나의 이야기

2017 .6. 1. 아직도 싸움 중

아~ 네모네! 2017. 6. 7. 16:35

아직도 싸움 중

아 네모네 이현숙

   결혼 초에는 남편과 무던히도 싸웠어요. 주로 술 먹고 늦게 온다고 트집을 잡았죠. 사실 똑 같이 근무하면서 누구는 퇴근하기 무섭게 어깨뼈 빠지도록 시장 봐가지고 와서 밥하고 누구는 친구 만나 노냐 노냐 술 먹고 놀다오는 게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았어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죠.

   그 때는 전화도 없어서 갑자기 약속이 생겨 늦게 오면 연락도 없으니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이거 결혼하자마자 생과부 되는 거 아닌가? 어디서 다른 여자 만나고 있는 거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런데 전화가 생긴 후에도 연락이 없이 늦게 오는 거예요. 나는 손가락이 부러졌냐? 왜 연락도 못하냐 하고 또 따졌죠. 남편은 다들 앉아있는데 혼자만 벌떡 일어나 전화기로 가기도 쑥스러웠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는 핸드폰이 없어서 공중전화를 써야했죠. 그렇게 체면이 중요하냐고 따지면 남편도 성질이 나는지

남자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올 수도 있지.”

하고 반격을 가하더라구요. 나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하나 달고 나왔다고 평생 더럽게 유세하네~”하며 빈정거렸어요.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나러 갔어요. 선생님이 아들 얘기를 하더군요. 아들이 일기에 아빠가 술 먹고 늦게 오는 얘기를 썼나 봐요. 선생님이 아들에게 아빠가 술 먹고 자주 늦게 오시느냐고 물으니

우리 아빠는요. 전화해서 금방 들어간다고 하면 12시예요.”라고 했대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이렇게 평생을 이런 저런 이유로 싸우며 40년이 넘게 살아왔네요. 지금은 술 먹고 늦게 와도 괜찮은데 왜 그렇게 꼬박 꼬박 일찍 들어오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안 싸우느냐하면 그건 아니죠. 화장실 변기에 오줌을 묻히면 왜 똑바로 보고 잘 눠야지 옆에다 흘리냐고 또 공격을 합니다. 아마도 저 세상으로 가기 전까지는 싸움이 그치지 않을 것 같아요.

부부란 전생의 원수가 만난 거란 말이 맞는가봐요. 하긴 인간이란 잉태되는 순간부터 싸움이 시작되는 건지도 몰라요. 수 억 마리의 정자가 난자를 만나기 위해 질주하는 그 때부터 경쟁은 시작되는 거죠. 정자가 한 마리만 나오면 싸울 일도 없고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네요. 수많은 정자들이 한 개의 난자를 집중 공격해야 난자 막이 뚫리고 그 중 한 마리가 안으로 들어가 수정이 된다고 해요. 어쩌면 싸움은 필요악인지도 몰라요.

   지인 중의 한 분이 얼마 전 남편을 잃었어요. 평소에 남편에 대해 불평불만이 가득한 모습을 본 우리는 이제 시원하겠구나 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죠? 그만 힘이 다 빠져 버렸는지 풀이 폭 죽어버렸어요. 음식을 먹을 때도 남편 생각에 눈물을 씻고, 꿈에 나타난 남편 얘기를 하면서 또 울었어요. 우리는 이런 모습에 적응이 안 됐어요. 80이 넘도록 살았으니 지겨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가 봐요. 가고 보니 남편이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때늦은 후회를 하더라구요.

   아마도 싸울 상대를 잃어서 이렇게 기운이 빠진 것 같아요.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여자 검투사 같았던 그 분의 모습이 어린양 같이 다소곳하고 얌전해진 걸 보면 검투사에게는 싸울 상대가 있어야 힘이 생기는 모양이에요.

   욕쟁이 할머니도 남편 죽으면 욕을 안 하고 기가 팍 죽는다고 하던데 아마도 아내들은 알게 모르게 남편 빽을 믿고 큰 소리 치는 게 아닌가 싶네요. 남편이란 울타리가 있으니까 그 안에서 기고만장 한가 봐요. 갑자기 이 울타리가 없어지고 허허 벌판에 혼자 서 있으면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하게 될 것 같아요.

   함께 산에 다니던 분이 친구 얘기를 하더군요. 자기 동창은 남편이 어찌나 고루하고 완고한지 해외여행은커녕 60이 넘도록 제주도 한 번 못 가봤다고. 그 놈 죽으면 그 몸에다 대고 오줌 쌀 거라고.

   그런데 그 남편이 갑자기 죽어 친구들이 이제 맘껏 여행 다니자고 하니까 이제 가고 싶은 데가 하나도 없다고 하더래요. 하던 짓도 멍석 깔아놓으면 하기 싫다는 말도 있잖아요. 누군가 못하게 말리는 사람이 있어야 할 의욕이 생기나 봐요.

   옆에서 끊임없이 딴지 걸고, 못 하게 말리는 상대가 있을 때 싸워가면서 무슨 일이건 해야 할 것 같아요. 싸움의 상대가 곧 내 삶의 원동력이 아닐까 싶네요. 치열하게 싸울 상대가 있는 걸 행복으로 여길 날이 곧 이를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