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5. 9. 18. 내 안의 아버지

아~ 네모네! 2015. 11. 20. 16:09

내 안의 아버지

아 네모네 이현숙

 

  내 어릴 적 아버지는 10환짜리 동전이었죠. 아버지는 한약방에 약재를 대는 중간상을 했어요. 아침이면 자전거에 한약재를 가득 싣고 팔러 갔어요. 언니와 나는 자전거 손잡이를 한 개를 잡고 늘어지며 언니는

“10환만. 10환만.” 하고 졸랐어요.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10환씩 주었지요. 우리는 그 돈을 받자마자 구멍가게로 달려가 눈깔사탕을 사먹으며 마냥 즐거워했어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어요.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 나가고 밤늦게 집에 오니 거의 대화는 없는 상태였지요. 그 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어서 원서를 내야했어요.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어느 학교 원서를 쓸 것인지 집에 가서 알아오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언니가 동덕여중 다니니까 너도 거기나 가라고 했죠. 이 말을 듣자마자 엄마가 버럭 화를 내며 무슨 동덕여중이냐고 경기여중 쓸 거라고 했어요. 엄마 의견대로 경기여중으로 갔죠.

  엄마는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다 말았어요. 학교 앞을 지나던 외할아버지가 운동장에서 남자 아이들과 뛰어노는 엄마를 보셨대요. 그날 저녁 외할아버지는 다 큰 계집애가 남자 애들과 함께 논다고 학교 가지 말라고 했대요. 갑자기 학교에 갈 수 없게 된 엄마는 너무도 안타까웠지만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대요. 엄마는 유난히 학교에 대한 미련이 많았어요. 아버지는 일에 파묻혀 지내느라 자녀교육에 신경 쓸 틈도 없고, 우리와 대화할 겨를도 없는 머나먼 당신이었죠.

  내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는 낯선 타인이었어요. 가정수업 시간에 성교육을 받았어요. 선생님은 칠판에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를 커다랗게 그려놓고 각 기관의 이름과 어떻게 애기가 생기는 지 설명해 주었어요. 그 때까지 그 과정을 잘 몰랐던 나는 충격을 받았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와 엄마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갑자기 낯선 이방인을 보는 것 같았어요. 길에 차고 넘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이 많은 인간이 모두 그런 짓을 통해 만들어졌나 하는 생각에 역겨움을 느꼈어요.

  내 나이 스물두 살 때 아버지는 울 줄 아는 하나의 평범한 인간이었어요. 그 때까지는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언니 결혼식을 마치고 온 날 밤 너무도 서럽게 눈물을 줄줄 흘리시더라고요. 엄마는 이런 아버지를 보고 시집 와서 너희 아버지 우는 것 처음 본다고 놀라셨어요. 첫 딸을 보내고 무척이나 허전하셨나봐요.

  내가 결혼한 후 아버지는 지친 가장이었어요. 내가 결혼해서 새 가정을 갖고 보니 가장의 자리가 얼마나 크고 그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업주부 엄마와 칠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허리 펼 날이 없었지요. 한약 썰고 숙지황을 찌고 말리고 배달하느라 하루해가 모자랐어요. 새벽부터 일어나 먼지 털고 청소하는 아버지가 아직도 눈에 보여요.

  90세가 넘은 아버지는 불쌍한 노인이었어요. 하루하루 막걸리 한 잔을 낙으로 삼고 여기 저기 빚 받겠다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시는 모습이 애처로웠어요. 우리 칠 남매가 단 물을 다 빼먹고 남은 쭉정이 같았어요.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는 세 살 박이 어린 아기였어요. 병원 침대에 누워 창문 커튼에 쓰인 안암동 우리 집란 글씨를 되뇌며 여기가 왜 우리 집이냐고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검사를 위해 음식도 물도 주지 않으면 물 달라고 보채고 가제 수건에 묻혀 입술만 적셔주면 입술에 바르기만 하면 어떡하냐고 꿀꺽 꿀꺽 넘어가게 줘야지 하며 투정을 부리셨죠.

  생기가 나가버린 아버지는 하나의 물체였어요. 수의에 싸인 아버지는 모든 욕망과 슬픔과 기쁨이 사라진 무생물 같았어요. 무아의 경지에 이른 모습이었죠.

  땅 속에 들어간 아버지는 한 줌 먼지가 되었어요. 그 먼지가 공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겠죠? 하지만 먼지 한 알갱이도 지구를 빠져 나갈 수 없으니 아버지는 항상 나와 함께 계실 거예요.

  장례식 때 문상 온 사람들이 아버지 사진을 보더니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네요. 나는 지금까지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 아버지도 있었나봐요. 내 안의 아버지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한 그 모습 그대로의 아버지죠. 이제 땅 속에 누워계시니 아무런 모습도 볼 수 없는 나의 아버지는 내 안에 영원히 살아계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