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5. 9. 7. 릴케의 프로방스 여행 독후감

아~ 네모네! 2015. 11. 20. 16:05

찾아가는 여행

아 네모네 이현숙

  릴케의 프로방스 여행은 한 마디로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여행이라고 해서 슬렁슬렁 놀러 다니며 쓴 글인 줄 알았더니 무슨 논문을 쓴 것 같다. 주로 화가들과 많은 교류를 가진 그는 여행지에서 여러 사람에게 많은 편지를 썼다.

  그는 1875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1911년 파리에서 출발하여 블로냐로 가는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프로방스였다고 고백한다. 1926년 한 여인에게 장미꽃을 꺾어주다가 가시에 찔려 같은 달 29일에 51세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도 충격적이다. 가시에 파상풍균이라도 있었던 걸까?

  릴케의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은 말테의 수기다. 학교 다닐 때 읽기는 읽었는데 도무지 뭔 소린지 몰라 헤매던 기억이 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절벽을 대하고 있는 듯 앞이 캄캄하다. 1m짜리 자로 바다의 깊이를 재는 것 같기도 하다. 만 미터가 넘는 바다를 1미터 자로 재는 나의 모습을 보는 듯 절망감마저 느껴진다.

  글씨는 또 왜 그리 작은지 온갖 인상을 다 쓰며 읽어야한다. 사진 밑에 있는 제목은 깨알 같은 글씨에 색깔마저 너무 흐려 이건 읽으라는 건지 그냥 넘어가라는 건지 도무지 편집자의 의중을 알 수 없다.

  첫 번째 편지는 생트 마리 드 라메르라는 곳에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라는 여성 작가에게 쓴 편지다. 릴케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으며 수년간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연인관계를 청산한 후에도 릴케가 죽을 때까지 친구이자 조언자 역할을 했다. 원래 이름인 르네를 라이너로 바꾸도록 조언한 것도 그녀다.

  엑상프로방스 호텔에서 그의 부인 클라라 릴케에게 보낸 편지도 사랑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지금까지 여행에서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뿐이라고 토로한다. 이제 제대로 보면서 여행한다면 틀림없이 무엇인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걸 보면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보인다.

  그는 세잔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세잔을 처음 접한 것은 세잔이 죽은 지 1년 후이다. 추모 전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갈망했던 릴케에게 세잔의 그림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그가 프로방스 여행을 한 목적도 세잔이 머물렀던 이 지방에서 세잔에 대해 더 알고 싶었던 것 같다. 부인에게 쓴 두 번째 편지에서도 온통 세잔에 대한 얘기만 일곱 장이 넘게 이어진다. 이런 편집증에 가까운 성격을 가졌으니 부인과도 1년 반 정도 밖에 같이 살지 못했나보다.

  세 번째 편지도 세잔에 관한 얘기인데 그 표현이 기막히다. 푸른색이 오렌지색을 불러내고, 초록색이 붉은 색을 호출한다는 것이다. 죽은 세잔이 산 릴케에게 이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걸 보면 예술의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글도 그 영혼을 실었을 때 이런 힘을 가진다. 한 사람이 죽은 후 백년 아니 천 년이 지나도 글에는 영혼이 남아 후대의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보 라는 지방에 대한 역자의 설명도 재미있다. 이 근처 광산에서 발견된 수산화알루미늄에 보크사이트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보라는 지명을 딴 것이라 한다.

  아비뇽에서 안톤 키펜베르크라는 출판업자에게 쓴 편지에는 제가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것은 사물들이 우리의 심장을 꺼내 먹고 오래도록 사는 꿈속의 본질과도 같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본질을 보고자하는 릴케의 강한 집념에 진저리가 쳐진다.

  한 문장으로 끝나는 편지도 있지만 대개 긴 문장으로 이어진 길고 긴 편지가 많다.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강한 의지 때문인 듯하다. 요즘은 편지도 쓰지 않지만 이렇게 긴 편지를 썼다가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듯하다.

  릴케는 끌려가는 여행이 아닌 찾아가는 여행을 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걸 찾고자 떠나는 여행이다. 나는 주로 남들이 가자는 곳에 그저 무작정 따라가며 그저 수박 겉핥기식의 여행을 하고 있다. 릴케의 무시무시한 집념과 열정을 본받고 싶다. 앞으로는 따라가는 여행이 아닌 찾아가는 여행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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