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 오메기~
아 네모네 이현숙
기간 : 2015년 10월 30일 ~ 11월 2일
장소 : 제주도
올해는 같이 산에 다니는 금옥씨 환갑을 맞는 해이다. 맘에 맞는 사람들이 환갑 축하 차원에서 제주도 여행을 하기로 했다. 제주도에서 키위 농장을 경영하는 양숙씨가 미리 가서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해주었다.
사려 깊은 사려니 숲 ( 10월 30일 )
제주공항에 내리니 양숙씨는 보이지 않고 웬 남자가 우릴 맞는다. 4일간 우리를 태워줄 기사라고 한다. 양숙씨는 키위 농장에서 기다린다고 하여 주소를 찍고 가는데 양숙씨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냥 지름길로 오지 말고 정석공항 쪽으로 오란다. 그 길에 억새가 많으니 감상하며 오라는 세심한 배려다. 과연 얼마를 달리니 억새밭이 나타나고 땅에 붙은 코스모스가 우리의 탄성을 자아낸다.
키위 농장에 도착하니 양숙씨 남편까지 마당에 나와 우릴 맞아준다. 키위 맛을 보라고 껍질까지 다 깎아놓고 우릴 기다린다. 우리는 목마르던 차라 폭풍 흡입으로 먹어치웠다. 특히 붉은 색이 들어있는 레드키위가 그 맛이 환상이었다.
대충 요기를 한 후 비닐하우스 속 키위를 보러 들어갔다. 메가그린키위라고 하더니 정말 메가톤급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아기 머리통만하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져 만져보고, 서서보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넣고 거꾸로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땅에 떨어진 키위를 주워 들고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가 전리품을 탈취한 기분으로 희색이 만면하여 밖으로 나왔다. 저녁에 숙소에 가서 먹자고 상자에 담아 차로 가져왔다.
오늘 일정은 사려니 숲길 걷기다. 입구에 도착하니 많은 차들이 보인다. 요즘 이곳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사려니는 살안이 또는 솔안이가 변형된 말인데 살이나 솔은 신령하다는 뜻이다. 즉 사려니는 신성한 곳이란 뜻이다. 숲길로 들어서니 은은한 단풍이 우릴 맞는다.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파스텔 톤의 단풍색이 우리 마음을 한 없이 어루만진다.
삼나무 숲길로 들어서니 쭉쭉 빵빵 뻗은 몸매의 삼나무가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 이 공기만 마셔도 만병통치되는 기분이다. 사려니 숲길을 걷고 나니 갑자기 사려 깊은 사람이 된 것 같다.
숲길 걷기를 마치고 표선 쪽에 있는 ‘하얀 언덕’이란 펜션에 들었다. 바닷가에 있는 아담한 집이다. 여주인이 나와 우릴 맞는데 하얀 생머리가 나하고 똑 같아서 친밀감이 느껴진다.
이층으로 올라가 김대장님과 육여사가 한 방으로 들어가고, 소띠 네 명이 한 방에 들었다. 젊은 동생 다섯 명은 간식 준비도 하고 식량 배급도 할 겸 한 방에 들어갔다.
1층 식당에 모여 생선회를 놓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미숙씨가 가져온 와인으로 환갑 축하를 했다. 생선회는 환갑을 맞는 금옥씨와 순자씨가 제공하여 푸짐하게 장만했다. 말이 환갑 축하 파티지 거의 강탈 수준이다.
백록 없는 백록담 ( 10월 31일 )
오늘은 한라산 정상까지 가는 날이다. 순자씨는 결혼식이 있어 서울 갔다가 내일 오겠다고 해서 공항으로 갔다.
성판악을 출발하여 백록담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시장 바닥이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앞 사람 엉덩이만 보고 간다. 정상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이곳뿐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12시 반까지 진달래 대피소를 통과하지 않으면 정상으로 가는 길을 통제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가야한다.
중간에 속밭대피소가 있다. 여기서 간단히 간식을 먹고 또 줄달음을 친다.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데 사람들이 서서 사진을 찍는다. 무얼 찍나 하고 쳐다보니 나무에 하얀 상고대가 붙어있다. 올 가을 들어 처음 보는 상고대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상고대를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건 그야말로 대박이요 로또 당첨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고대를 보니 완전 보너스 받은 기분이다.
보너스까지 받고 보니 발걸음이 가볍다. 한 달음에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다. 통제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지만 일단 정상에 다녀오다가 여기서 컵라면을 먹기로 했다.
긴 계단 길을 올라가는 행렬이 이사 가는 개미처럼 보인다. 우리도 느릿느릿 행렬을 따라 올라서니 넓은 나무 데크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간식을 먹는다. 정상 표지석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어찌나 긴지 인증사진 찍기를 포기했다. 백록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후미를 기다렸다.
한라산 정상에서 먹는 약식 맛은 천하 일미다. 양숙씨가 우릴 위해 견과류를 잔뜩 넣고 만든 홈메이드 약식이다. 우린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기에 이토록 좋은 곳에서 눈 호강, 입 호강을 하는지 모르겠다.
관음사 가는 길은 낙석 발생으로 출입이 통제 되어 다시 성판악으로 내려가야 한다. 물기 없이 바짝 마른 백록담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1968년 대학교 1학년 때 산악회 선배들과 처음 이곳에 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호수까지 내려갈 수 없게 목책과 나무 데크로 막아 놓아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 때는 호수로 내려가 물에서 세수도 하고 호수 안에 들어가 사진도 찍었는데 지금은 접근 금지니 아쉽기 짝이 없다. 지금의 백록담은 그야말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오랜 옛날에는 이 호숫가에서 백록(하얀 사슴)이 뛰어 놀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상 속의 풍경일 뿐이다.
진달래 대피소로 내려오니 컵라면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어찌나 긴지 입이 벌어진다. 그냥 포기할까 하는 순간 양숙씨가 눈에 들어온다. 발 빠른 양숙씨가 먼저 와서 줄을 서고 있다. 1인당 두 개씩 밖에 안 판다. 그래도 발 빠른 사람들 덕에 나 같은 굼벵이도 라면을 먹을 수 있었다.
뜨끈한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하산을 시작했다. 한참을 내려오니 사라오름 갈림길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틀어서 사라오름으로 갔다. 사라오름은 몇 년 전 겨울에 환상적인 상고대와 눈꽃을 본 곳이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호수에 물도 없고 별 볼일 없다고 한다. 그래도 끝까지 올라가니 넓은 호수는 메마른 들판으로 변하고 풀들만 우거졌다. 호수로 내려가지 못하게 밧줄로 막아 놓아 그냥 눈요기만 하고 돌아섰다. 한 겨울 꽁꽁 언 호수에 엎어져서 찍고 자빠져서 찍고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속밭대피소에 이르니 까마귀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렸다. 사람들이 먹다 흘린 간식을 먹으려는 속셈이다. 까마귀가 잘 먹어서 그런지 장닭 만하다. 목소리도 어찌나 큰지 무슨 큰 짐승 소리 같다.
속밭대피소를 지나 끝없이 이어지는 돌길을 지나 성판악에 이르니 내 다리인지 네 다리인지 모르게 무감각하다. 그래도 낙오자 없이 모두 정상까지 다녀오니 마음이 흐뭇하다. 차에 오니 웬 오메기 떡이 기다리고 있다. 순자씨가 공항 가는 길에 떡을 사서 차에 실어준 것이다. 하루 종일 걸은 우리는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웠다. 순자씨의 따뜻한 마음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돈 내라는 돈내코 ( 11월 1일 )
오늘은 어리목에서 윗세오름 대피소를 지나 돈내코로 내려오기로 했다. 첫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온 순자씨를 만나 산행을 시작했다.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 몇 년 만에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어리목에서 사제비동산 가는 길은 낙엽이 깔려 레드 카펫을 깐 듯하다. 길옆에는 푸른 산죽이 가득하여 단풍색이 더 돋보인다. 사제비동산에 가면 제비를 만나 사교춤 한 바탕 출 줄 알았더니 제비는 간데없고 억새만 가득하다.
억새밭에서 사진을 찍는데 김 대장님이 소띠끼리 찍자고 한다. 열 한 명 중 소띠가 다섯 명이다. 늙은 암소 네 마리에 젊은 수소 한 마리다. 이걸 보더니 원숭이띠도 찍겠다고 억새밭으로 들어간다. 원숭이가 세 마리, 양이 두 마리, 쥐가 한 마리다. 띠 별로 모두 찍고 만세동산으로 향했다.
만세동산 전망대에 오르니 백록담 화구벽과 여러 개의 오름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만세를 부르며 단체 사진을 찍고 데크에 둘러 앉아 간식을 먹었다. 연옥씨가 직접 농사지은 땅콩으로 배를 채우고 윗세오름대피소를 향해 출발했다.
윗세오름 대피소에 이르니 여기도 컵라면 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라면은 포기하고 돈내코 방향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바라보는 백록담 화구벽 능선에는 용암이 식으며 생긴 바위들이 기기묘묘하다. 산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과 말도 보이고 뒤에서 기어 올라가는 거북이도 보인다.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곰 모양의 바위도 있다.
방아오름샘에 이르니 방아오름 전망대가 있다. 여기서 보는 백록담 남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용암이 터져 나오며 쌓인 벽이 거대한 성채를 보는 듯하다. 그 웅장함에 자연의 위대함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압도하는 기세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남벽을 뒤로 하고 산죽이 깔려있는 길을 걷다보면 넓은드르 전망대가 나타난다. 넓은 들에 있어서 넓은 드르라는 이름이 붙었나보다. 이 전망대는 대피소 지붕 위에 있다. 여기 서면 섶섬, 문섬, 새섬, 범섬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고 리모델링을 했는지 페인트 냄새가 진동한다.
대피소를 나와 돈내코로 내려오는데 위에서 내리던 싸라기가 이슬비로 변한다. 김대장님이 돈내코에 오려면 돈 내고 와야 하는데 돈을 안내서 비가 오나보다고 농담을 한다.
돈내코 주차장에 도착하니 저녁식사 하기에는 시간이 이르다. 쇠소깍을 보러 가기로 했다. 쇠는 소라는 뜻이다. 우돈이라는 지명을 따서 ‘쇠소’ 또는 ‘우소(牛沼)’라고 했다. ‘깍’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를 일컫는 제주도 방언이다. 즉 쇠소깍은 쇠소와 바다가 만나는 곳을 말한다.
쇠소깍에는 넓은 웅덩이가 형성되어 초록색 물 위에서 보트를 타는 연인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와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축하하는 파티를 벌였다. 와인을 마시며 이번 회비 사용과 다음 여행에 대해 얘기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늙은 암소 네 마리는 입에 망을 씌운 듯 함구무언이다. 하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여기 붙여준 건만도 감지덕지하다. 이 시점에서 공연히 입을 잘못 놀리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리하여 우리 암소 네 마리는 찍 소리도 안 하고 쥐 죽은 듯 앉아있었다.
얘기가 끝나자 순자씨가 자기 전에 먹으라고 에드빌을 나눠준다. 연 이틀 걸었으니 힘들 거라고 하며 이 약이 진통도 시키고 잠도 잘 오게 한다는 것이다. 이때 마침 육여사가 들어와 약을 주니 이게 무슨 약이냐고 하며 흥분제냐고 묻는다. 이 소릴 듣고 다들 뒤집어지게 웃었다. 비아그라도 이렇게 푸른색이라는 것이다. 소녀 같은 육여사가 비아그라를 보기나 했을까? 나도 여태 못 보았는데 말이다.
돌아가지 못한 섬 차귀도 遮歸島 ( 11월 2일 )
오전에는 올레길을 걷고 오후에는 차귀도에 가기로 했다. 올레길에는 야자수도 있고, 송엽국, 억새 등이 있어 운치를 더했다. 군데군데 탁자도 있어 간식 먹기도 좋다.
갑자기 어디서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우리 앞서 간다. 뒤에서 보니 땅에서 무언가를 물고 달려간다. 그 순간 정옥씨가 무얼 부지런히 찾는다. 무얼 찾느냐고 했더니 장갑 한 짝이 없어졌단다. 개의 입을 자세히 보니 장갑 같다. 너무 빨리 가니 좇아갈 수도 없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길옆에 두고 간다. 부지런히 가보니 정옥씨 장갑이다. 제주도 개는 올레군들이 힘들까봐 장갑도 들어다 주나보다.
더 가니 이번에는 묶인 개가 있다. 짖지도 않고 김대장님에게 꼬리를 흔들며 달려든다. 개집 앞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하얀 강아지가 앉아있다. 대장님이 강아지를 찍으려고 가까이가도 전혀 경계하는 기색이 없다. 제주도 개는 사람들과 하도 가까이 하다 보니 제 새끼 보호하는 본능도 잊었나보다.
길 가의 꽃을 들여다보다가 양숙씨가 이게 뭐지 하기에 땅을 보니 주민증, 비자카드, 현금 등이 떨어져 있다. 조금 전에 어떤 여자가 여기서 사진을 찍었다는 거다. 양숙씨가 주워서 부지런히 좇아갔지만 보이지 않는다. 이거 없으면 비행기도 못 탈 텐데 큰일이라고 하며 파출소에 갖다 주기로 했다. 쌍둥이 횟집에서 점심을 먹고 파출소를 찾아가 습득물을 맡겼다.
뱃시간에 대려고 마구 달려 고산 선착장에 도착하니 떠날 시간이 다 됐다. 차귀도까지는 10분도 안 걸린다. 차귀도 선착장에 내리니 바다색이 어찌나 푸르고 투명한지 감탄사가 절로 난다.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범바위와 위풍당당한 장군바위가 우리를 맞아준다.
차귀도에는 오랜 전설이 있다. 중국 송나라 때 송나라 임금이 제주에서 큰 인물이 나타나 송나라를 위협할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걱정이 생긴 임금이 호종단이란 풍수지리사를 제주로 보내 좋은 기가 흐르는 수맥을 끊어 버렸다. 임무를 마치고 돛단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는데 제주도 수호신이 매로 변해 나타나서 돛을 찢어버렸다. 마침 큰 폭풍이 일어 배가 이 섬 절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그 후로 돌아가는 길을 차단했다고 하여 섬 이름을 차귀도라 했다.
섬 트레킹을 하려고 언덕으로 올라서니 드넓은 억새밭이 펼쳐진다. 다들 멋지다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바다의 파도처럼 일렁인다.
꿈속 풍경처럼 아련한 섬 풍경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다. 바다와 억새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정신없이 걷다보면 볼래기등대에 이른다. 볼래기동산에 있는 이 등대는 이 섬 주민이 돌을 직접 날라다가 지었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가슴이 볼락볼락 뛰었다고 해서 볼래기라 불렀다고 한다. 그림 같은 초원 위의 등대를 지나 섬을 한 바퀴 돌아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고산 선착장으로 돌아올 때는 섬을 한 바퀴 돌며 선장님의 설명을 듣는다. 배에서 보니 독수리 바위는 막 날개를 펴며 비상을 준비하는 중이다. 차귀도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록되었다고 하더니 바닷가 절벽의 지층과 암석이 일품이다.
차귀도 트레킹까지 마치고 공항으로 오다가 제주 특산품 오메기떡을 사기로 했다. 너도 나도 산다고 하기에 나도 두 상자 신청했다. 기사가 떡을 가져온 순간 아차 싶었다. 짐도 무거운데 떡 두 상자를 들고 집에 까지 가려니 앞이 캄캄하다. 제주공항에서 다들 상자를 뜯고 알맹이만 배낭에 넣었다.
김포공항에 내려 떡 두 상자가 든 배낭을 메고 오려니 어깨뼈가 부러질 것 같고 ‘오메~오메기가 사람 잡네~’ 소리가 절로 난다. 하지만 벌써부터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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