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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14. 3. 1. 그 남자

by 아~ 네모네! 2014. 4. 19.

그 남자

아 네모네 이현숙

 

  2호선 전철을 타고 경로석에 앉아 책을 읽는다. 멀리서 찬송가 소리가 들린다. 시각장애인이 구걸을 하러 다니나보다.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도와줄 마음이 없기도 하고 지갑을 꺼내는 게 귀찮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내 앞을 지나 옆의 칸으로 이동하는 장애인의 구두 뒤축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익다. 얼른 올려다보니 패딩 잠바도 어디선가 본 듯하다. 그 남자다.

  몇 달 전 새벽기도에 가니 처음 보는 남자가 신사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넥타이까지 하고 앉아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왔나 생각하며 내가 늘 앉던 자리에 가 앉았다.

  그 후로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 남자는 왔다. 열 손가락도 안 되는 사람 속에서 그를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자세히 보니 새벽인데도 선글라스를 끼었다. 앞에 성경책도 없다. 알고 보니 시각장애인이다. 주기도문도 잘 외우고 찬송가도 웬만한 것은 외워서 부르는 걸 보면 교회에 오래 다녔나보다.

  어쩌다 내 앞에서 가는 걸 보면 신통하게도 교회 문을 잘 찾아 들어간다. 나올 때도 지팡이를 두드리며 곧장 가다가 정확히 담이 끝나는 곳에서 좌회전을 한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발걸음 수를 세어서 좌회전 우회전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각 장애인이 길 갈 때는 말을 걸면 숫자 세는 것을 헷갈려서 혼란이 온다는 것이다.

  나는 화요일마다 산에 간다. 건대 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는데 그 남자가 계단을 올라간다. 7시도 안 되었는데 참 일찍도 나왔다. 하긴 만원인 전철에서는 플라스틱 바구니 들고 다닐 수도 없을 거다. 이번에는 꼭 천원이라도 주려고 마음먹고 의자에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린다. 잠실역에서 내릴 때까지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맨 뒤 칸으로 가서 쭉 훑어 오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전철을 놓치고 다음 전철을 탔을 수도 있다.

  그 후로도 화요일이면 몇 번이나 그를 승강장에서 만났다. 그는 여전히 지팡이를 두드리며 맨 뒤 칸으로 가고 있다. 나는 2번째 칸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한 번도 내가 있는 곳까지 오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를 것이다. 사오십 대는 되어 보이는데 결혼은 했을까? 저렇게 구걸을 하여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 나라에서 보조금은 받고 있을까? 저토록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도와줘야 마땅하다. 구걸도 일종의 직업인데 성실하게 사는 그가 존경스럽다.

  오늘도 새벽기도에 나와 열심히 찬송하고 기도하는 그를 뒤에서 바라본다. 귀가 멀지 않고 눈이 먼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눈을 감고 동영상의 소리를 들으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쉽지만 스피커를 끄고 동영상만 보면 전혀 그 뜻을 알 수 없다. 귀머거리가 소경보다 더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자막이란 것이 있으니 영화를 보거나 길을 걸어 다닐 때는 더 편리한 점도 있다.

  눈과 귀가 열렸다고 마음이 열린 것은 아니니 어쩌면 그 남자가 더 많은 자연과 소리를 받아들일 지도 모른다. 목사님이 설교할 때마다 아멘 아멘 하는 걸 보면 하나님의 음성도 더 잘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는 오늘도 지하철 속을 헤매며 오늘의 양식을 위해 수고할 것이다. 몸의 눈은 보이지 않을지언정 마음의 눈을 크게 떠서 세상만물을 바라보고 영의 눈도 밝아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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