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있는 아우성
아 네모네 이현숙
한화와 함께 하는 2014 교향악 축제 중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연주를 보러갔다. 첫째 곡은 이영조가 작곡한 여명이다. 이 곡은 처음 듣는 것이라 잘 모르겠지만 여명이 밝아오는 듯 은은한 느낌이 든다. 연주가 끝나고 작곡자가 직접 나와 관객에게 인사하는 것이 보기 좋았다.
두 번째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이 곡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친숙한 곡이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대 작곡가다.
그의 아버지는 무리한 투자로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가족을 버렸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사촌 알렉산드르 실로티는 라흐마니노프의 재능을 알아보고 모스크바에 있는 저명한 음악교사인 니콜라이 즈베레프의 가르침을 받도록 권유했다. 라흐마니노프가 위대한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엄격하게 훈련시킨 즈베레프 덕분이다.
젊은 시절의 라흐마니노프는 대인관계와 작품의 성패에 따른 정서적 불안에 휩쓸렸다. 자기 불신과 불확실성은 그를 깊은 침체 속으로 빠뜨렸는데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교향곡 1번의 실패에 따른 것이었다. 비평가들은 형편없는 연주라고 그를 비난했다.
또한 이 시기에 사랑의 실패로 고통 받던 라흐마니노프는 정신과 의사인 니콜라이 달의 치료를 받았다. 달은 라흐마니노프를 끊임없이 격려하며 자신감을 회복시켜줌으로써 그가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달에게 헌정하였다.
이 곡을 들으며 도대체 라흐마니노프는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기에 이토록 아름답고 가슴 저린 선율을 만들어 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무덤이라도 파헤쳐 세포 하나라도 남았으면 DNA 검사라도 해서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을 알고 싶다.
피아노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보리스 길트버그가 연주하였다.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도무지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다. 단지 버그라는 발음에서 벌레를 연상하며 그의 연주를 들었다. 무대에 오르는 그를 보니 키도 자그마하고 왜소하게 생겼다. 그런데 연주는 그야말로 환상이다.
건반 위에서 춤추는 그의 손은 칼날 위에 서서 춤추는 무당의 발을 연상시킨다. 자아를 잃고 신들린 인간의 모습이다. 같은 러시아 작곡가의 작품이라 더 작품에 몰입되어 연주했는지 모른다.
도대체 러시아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이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라흐마니노프와 길트버그를 만들어낸 러시아의 정서와 자연과 하늘과 땅은 어떤 것일까? 아니 이들을 길러낸 별과 숲과 바람은 어떤 것이었을까? 러시아의 깊고 깊은 저력이 느껴진다. 러시아 국민의 위대함이 묻어난다. 아니 이 작품은 온 우주가 함께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연주를 마치고 들어가는 그의 팔이 유난히 길어 보인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거의 무릎까지 내려온다. 침팬지나 원숭이를 연상시킨다. 손도 유난히 커 보인다. 부모에게 이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인지, 아니면 다섯 살부터 피아노를 쳐서 그렇게 성장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연주를 듣는 동안 도대체 내가 숨을 쉬었는지 안 쉬었는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음악에 몰입되어 그의 신에게 내가 신들린 듯하다.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자 앵콜곡을 두 개나 연주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그를 보니 아껴야할 것 같다. 저렇게 에너지를 탕진하다가는 요절해 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박수가 계속 이어지자 교향악단 단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제서야 관객들은 겨우 그를 놓아주었다. 우리 국민들도 우리 모두의 힘을 합쳐 이런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 냈으면 좋겠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2번까지 모두 마친 후 김대진 지휘자가 단상에서 안타까운 말을 한다. 남해상에서 침몰한 세월호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실종자들의 빠른 구조를 기원하는 곡을 연주할 테니 곡이 끝나면 박수도 치지 말고 조용히 퇴장해 달라는 것이다.
엘가의 곡을 듣고 있자니 세월호를 타고 가다 실종된 수백 명의 단원고교 학생들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친다. 눈물이 그치지 않고 볼을 타고 내린다. 이 추운 날에 그 차가운 바다에서 그들이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배 안의 어딘가에 공기가 차 있다면 그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체온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그 부모들은 얼마나 속이 탈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태초의 언어는 음악이 아니었을까 싶다. 바벨탑을 쌓다가 각 민족의 언어가 갈라졌다고 하는데 그 전에는 음악으로 소통했을 것 같다. 음악은 말 한 마디 없이 우리의 심령을 뒤흔든다. 그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아니 소리 있는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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