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3. 8. 4. 안개가 쥐약이네

아~ 네모네! 2013. 11. 18. 16:59

안개가 쥐약이네

 

아 네모네 이현숙

  북미 최고봉이라고 하는 메킨리 등반에 나섰다. 체력부진과 기상 악화로 등정을 포기한 채 힘없이 하산을 하였다. 개썰매가 아닌 인간 썰매를 끌며 빙하 위에서 1516일을 머물렀다.

  아침에 일어나 텐트 옆으로 가니 커다란 크레바스가 보인다. 얼음 동굴 같다. 동굴 천장에는 고드름까지 달렸다. 저렇게 커다란 동굴에 빠지면 얼마나 깊이 빠질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하지만 그 색깔은 어찌나 깊고 오묘한지 보면 볼수록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다.

  오늘은 랜딩 포인트까지 내려가 경비행기를 타는 날이다. 16일 동안 씻지 못해 앵커리지 가면 목욕부터 하려고 다들 벼르고 있다. 목욕 순서까지 미리 정하고 하산을 서둘렀다. 2캠프에서 1캠프까지는 내리막이라 그런대로 잘 내려왔다. 1캠프에서 랜딩 포인트까지는 오르막길이라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안개가 끼어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썰매 자국만 따라 하염없이 가려니 길을 잘못 든 것 같기도 하고 4차원의 세계에 빠진 듯도 하다.

  오목한 곳은 크레바스라고 하여 빠질까봐 양 옆을 스틱으로 짚으며 잽싸게 건너갔다. 길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비몽사몽 걷다보니 안개 속에 희미하게 랜딩 포인트가 나타난다. 가까이 다가가니 같이 갔던 기아팀은 경비행기를 타고 이미 출발했고 경기팀과 우리만 남았다.

  날씨는 개였는데 계곡에는 안개가 가득하다. 눈보다 무섭고 비보다 무서운 게 안개다. 하늘은 맑게 개여 등짝이 따가운데 경비행기는 오지 않는다. 4시에서 8시까지 카고백을 깔고 앉아 기다리려니 졸음이 쏟아진다. 대장님은 카고백에 드러누웠고 연희씨는 똥통을 깔고 앉아 졸고 있다. 여기서는 플라스틱으로 된 똥통을 가지고 다니며 여기에 대변을 보아야 한다. 박전무님은 기아팀이 두고 간 카고백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조는 모습이 마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같다.

경기연맹의 유대장님은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든다. 동그란 쵸컬릿을 박아 눈을 만든 다음 가는 막대를 잘라 눈썹과 코, 입도 만들고 조금 긴 막대로 팔을 꽂아 만세를 부르게 만들었다. 짜증 내지 않고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다. 랜딩 포인트에서 일하는 여자 직원 리사를 도와 눈도 퍼다 주고 장기도 두며 즐겁게 기다리고 있다.

  남자 직원이 나와서 오늘은 비행기가 오지 않는다고 하여 짐을 다시 풀고 텐트를 쳤다. 호선생님은 목욕 순서 표까지 나누어 주더니 가지도 못한다고 농담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는 여유가 부럽다. 오늘로서 쿡 신세를 면하는 줄 알았던 혁이와 영준씨도 실망의 빛이 역력하다. 텐트 생활 오늘로서 종 치는 줄 알았더니 다시 시작이다.

  다음 날 유병장 알파미 비빔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설원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경비행기를 기다렸다. 눈은 하루 종일 그칠 줄 모르고 랜딩 포인트의 비행사 직원들은 천막 밑에 의자를 엎어 놓고 아예 자기들 텐트로 들어가 버렸다.

  대장님은 대변을 보러 갔다 오더니 성공했는지 준우승 했다고 희색이 만면하다. 똥통에 앉아 변을 보려면 엉덩이가 끼어 아프고 눌린 자국이 푹 들어간다. 그래서 가급적 빠른 시간에 신속하게 끝내야 한다.

  호선생님이 휴지로 코를 막았기에 코피 났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연희씨는 고소를 안 해 자기는 코피도 안 나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자랑한다. 그러자 호선생님이 야크가 인간하고 같으냐고 놀린다. 연희씨는 정말 야크처럼 고소 체질인가 보다.

  박전무님 텐트는 취침 중이고 경기 연맹 텐트는 고스톱이 한창이다. 경기 연맹의 학감님이 우리 텐트로 와서 자신의 해외 원정기를 얘기한다. 우리는 신기한 듯이 어린애처럼 넋이 빠져 재미있게 들었다. 또 목욕 얘기가 나와서 학감님이 자기도 순서에 넣어야 한다고 해서 순서를 다시 짰다. 대장님이 제일 빠르니 1순위, 다음이 학감님, 그리고 나, 부용씨, 연희씨 그리고 호선생님이 제일 오래 한다고 꼴찌에 넣었다.

  학감님이 가고 나서 호영진 리사이틀을 벌였다. 호선생님이 인터넷에서 뽑은 수십 개의 노래 가사를 수첩에 붙여 호영진 애창곡집을 만들어 왔다. 대장님과 한 바탕 노래를 불러 제키니 외국인 남녀 한 쌍이 구경 왔다. 텐트 앞에서 신나게 듣더니 자신도 한 곡조 뽑으며 춤까지 춘다. 밖에는 눈이 끝없이 내리는데 텐트 안에서는 노래가 한없이 흘러나온다.

  리사이틀을 마치니 저녁밥을 준다. 하루 종일 한 일도 없는데 터진 입이라고 밥은 잘 들어간다. 이렇게 오늘은 비행기가 한 대도 오지 않았다. 6일 동안 비행기가 못 뜬 때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은근히 겁이 난다. 식량도 떨어지고 연료도 떨어지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매킨리가 올라가지도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내려가지도 못 하게 한다. 우리가 엄청 좋은가보다.

  다음 날은 수시로 안개가 덮였다 벗어졌다 한다. 아침도 안 먹고 텐트를 걷어 짐을 싸 놓고 마냥 기다렸다. 오늘도 못 가는 게 아닌가 속을 태우는데 10시나 되어 겨우 한 대의 비행기가 안개 속에 나타났다. 겨우 겨우 활주로에 내리니 경기팀이 짐을 지고 달려간다. 우리보다 랜딩 포인트에 먼저 왔으니까 당연히 먼저 간다. 우리 일중팀 4명과 박부장님, 유대장, 혁이와 영준씨 이렇게 여덟 명이 남았다.

  리사에게 다른 비행기가 오고 있느냐고 물으니 이 비행기가 갔다가 다시 와야 한단다.

이런 된~장 비행기가 이거 하나 밖에 없냐?’ 하며 불평이 절로 나온다.

  이게 갔다가 다시 오려면 아무리 빨라야 1시간 반인데 언제 기다리나 싶다. 아침도 안 먹어 뱃속에서는 밥 들어오라고 난리다.

  간식이라도 먹으려는데 리사가 나오더니 모두 설피를 신고 나오란다. 활주로를 다져야한단다. 어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행기가 이착륙하기 힘든가보다. 모든 텐트에 있던 사람들이 다 나와 일렬로 서서 활주로 끝까지 걸어갔다가 되돌아오며 눈을 다졌다.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는데 눈밭을 걸어 다니려니 진땀이 절로 난다. 대장님과 호선생님은 열심히 다지는데 나는 대충 걸어 다니며 시늉만 냈다.

  12시나 되어 리사가 비행기가 오면 빨리 타라고 하여 카고백을 앞으로 내놓고 배낭까지 지고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또 안개가 뒤덮여 한 치 앞이 안 보인다. 비행기는 내리지 못하고 다시 돌아 멀어진다. 되돌아 갔나보다고 실망하고 있으니 다시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도 또 내리지 못하고 멀어진다. 이렇게 열 번 정도 시도 하다가 멀어지니 우리는 애가 타서 속이 새카맣게 변했다.

  거의 포기를 하고 있는데 리사가 무전기를 들고 활주로 가운데로 가더니 조종사와 무전으로 교신하며 착륙을 유도한다. 보이지도 않던 비행기가 안개 속에서 나타나 착륙을 하는데 정말 그 기술이 신기(神技)에 가깝다.

  우리는 총알 같이 튀어 나갔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싱가포르에서 왔다고 한다. 그들도 못 내리는 줄 알고 엄청 속을 태웠나보다. 우리는 빨리 탈 욕심에 그 사람들 짐까지 다 내려주고 번개 같이 짐을 싣고 비행기에 올랐다. 안개가 더 짙어지면 눈밭에서 또 며칠이나 있어야할지 모르니 그야말로 필사적이다. 원래는 프랑스 사람 두 명이 우리보다 먼저라서 두 명이 남아야하는데 그들이 양보해 주어 여덟 명 모두 탈 수 있었다.

  비행기는 안개 속에서 떠올라 산봉우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이러다가 바위산에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게 아닌가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구름 속을 계속 가려니 제대로 착륙이나 할지 또 걱정이 된다. 물어볼 수도 없어 조종사의 얼굴만 살피니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이 편안한 표정이다. 그 표정을 보니 나도 안심이 된다. 30분 정도 가니 밑으로 푸른색 나무들이 보인다. 회색의 강도 보이고 지나가는 차도 보인다.

  무사히 탈키트나 비행장에 내려 땅을 밟으니 이제 살았구나 싶고 18일 만에 처음 땅을 밟으니 감개무량하다. 오늘은 날씨가 나빠 더 이상 비행기 운행이 없다고 한다. 눈밭에서만 살다가 초록의 나뭇잎을 보니 이렇게도 눈이 편안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람은 자고로 나무가 살 수 있는 곳에서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식물도 살 수 없는 곳은 인간도 살 수 없다.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고 신의 세계다. 앞으로는 신의 세계를 넘보지 말아야겠다. 플라스틱 삼중화를 벗어 당장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제 아름답고 편한 곳만 다니겠다고 다짐하고 또 결심했다.

  식당에 가서 햄버거를 먹고 레인저 사무실에 들러 하산 신고를 한 후 똥통을 반납했다. 추모 공원에 들러 고상돈 대장과 매킨리에서 사망한 대원들을 위해 묵념을 하고 앵커리지로 출발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대충 꺼내 놓고 파김치가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그토록 야들야들하고 가볍고 하얀 안개가 비행기에게 완전 쥐약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