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읽는 동화>
난 다 알아요
아 네모네 이현숙
제가 세상에 나온 지도 벌써 십칠 개월이 되어가네요. 저는 작년 봄에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아빠가 미국에 공부하러 와서 저를 낳았거든요. 하지만 작년 여름 엄마와 함께 한국에 왔어요. 서울에서 산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답니다.
그동안 참 많이 컸지요. 처음 한국에 와서는 기어 다니지도 못했는데 요새는 신발 신고 마구 뛰어다녀요. 요즘은 어른들이 하는 말도 대충 다 알아듣지요. 물론 잘 모르는 말도 있지만 눈치가 빨라서 대충 때려 맞춘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할아버지 집에 놀러가지요.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이야기 하느라 저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슬그머니 괘종시계 밑의 화분으로 간답니다. 화분의 흙을 냉큼 집어 입에 넣으려하면 아빠가 “에비 에비.” 하면서 질겁을 하고 달려들지요. 그러면 얼른 마룻바닥에 던져 버려요. 나도 흙이 더럽다는 거 다 알고 있거든요.
전화기를 들고 귀에 대면 할머니가 얼른 대신 말을 해주지요. 내가 말을 아직 못 하거든요. “여보세요. 거기 이안이 있어요? 이안이가 뭐하고 노나요?” 하면서 같이 놀아준답니다. 나도 사실 이게 가짜 통화라는 걸 다 알지요. 할머니가 그냥 흉내만 내주는 걸 난 다 알아요.
말은 못해도 제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어요. 신발을 가리키며 엥! 엥! 하면 나가고 싶다는 것이고. 높이 있는 인형을 가리키며 응 응 거리면 인형 달라는 것이지요. 카메라를 가리키며 잉 잉 하면 카메라 달라는 것이고 우유병을 꺼내 들고 엄마를 갖다 주면 우유 달라는 것이지요. 카메라를 마구 주무르다가 잘못해서 꺼져버리면 할머니에게 주면서 할머니를 뻔히 쳐다보지요. 그러면 할머니가 알고 얼른 다시 켜준답니다.
이렇게 놀다가 또 어른들의 관심이 약해진다 싶으면 소파 옆에 있은 작은 화분으로 달려가 순식간에 나뭇잎을 뜯어 입에 넣어요. 그러면 엄마가 달려와 “안아 그건 먹는 거 아냐.” 하면서 내 입을 벌리고 나뭇잎을 꺼내느라 난리 법석이 난답니다. 나도 이거 못 먹는 건 줄 다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 어른들이 난리 치는 것이 재미있고, 이런 짓을 하면 다들 관심을 가져주니 신이 나요.
이것도 싱거워지면 전화기 옆에 있는 명함들을 다 쏟아놓고 신나게 휘저으며 마룻바닥에 마구 팽개치며 놀아요. 안방에 들어가 곰 인형을 끌어내 코를 물어뜯기도 하고 컴퓨터 방에 들어가 아빠가 컴퓨터를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스위치를 눌러 꺼버리지요. 어른들이 당황해 할 때마다 이런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이렇게 신나게 놀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가요. 길 가던 할아버지가 저를 보고
“그 녀석 참 잘 생겼네. 장군감이네.”
하면 아빠 엄마 얼굴 가득 미소가 번져요. 저도 할아버지가 엄마 아빠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줄 다 알아요. 제가 커서 장군이 될지 졸병이 될지 지금 어떻게 알겠어요.
어른들은 부대찌개를 냠냠 짭짭 맛있게 먹는데 저는 엄마가 집에서 가져간 밥에 김을 싸서 먹어요. 그러면 심술이 나서 대충 씹다 말고 넘기지요. 김이 목에 걸려 캑 캑 대면 할아버지가 깜짝 놀라
“김이 너무 큰가보다 작게 해서 먹여라.” 하시지요.
할아버지 식사하는데 저지레를 할까봐 엄마는 나를 놀이방에 데려가요. 거기 가니 게임기 두 대가 있는데 형들이 다 차지하고 있어서 만져볼 수도 없네요.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형들 엄마가 와서 “야! 다들 와서 밥 먹어.” 하고 소리치는 거예요. 형들이 밥 먹으러 간 사이 저는 얼른 게임기 앞에 앉지요.
아까 보니 왼쪽 게임기에는 형 둘이 붙어서 하고 오른쪽 것은 혼자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왼쪽 것이 더 재미있나 봐요. 저는 왼쪽 게임기에 앉아서 손잡이를 잡고 전후좌우 마구 휘둘렀어요. 왼손으로는 손잡이를 돌리고 오른 손으로는 버튼을 마구 누르니 화면의 인형들이 마구 움직이더라구요.
한참 정신없이 놀고 있는데 형들이 금방 밥을 먹고 다시 오는 거예요. 와서는 나를 밀어내고 다시 하려고 하네요. 저도 끝까지 손잡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어요. 물론 형들이 나보다 힘이 세고 나를 떼어낼 수도 있지만 나는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형들이 어쩌지 못할 것을 뻔히 알고 있지요.
형들도 너무 어린 나를 어쩔 수 없으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더라구요. 한참 놀고 있는데 할머니가 집에 가자고 내 짐을 들고 오네요. 저는 놀만큼 놀았으니까 못 이기는 척 그냥 따라 나왔어요.
유모차를 타고 집에 가면서 속으로 빙그레 웃었어요. 나도 알 것은 다 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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