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3. 1. 19. 그 회화나무 아래 내가 있었네.

아~ 네모네! 2013. 8. 3. 13:57

그 회화나무 아래 내가 있었네

 

아 네모네 이현숙

  지금도 모교 앞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안쪽을 기웃거린다. 아이들이 뛰놀던 운동장은 텅 비어있고 운동장 가운데 회화나무 혼자 외로이 서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중구 정동에 있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운동장 가운데 우뚝 선 큰 회화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 몇 백 년은 된 듯하다. 교문 왼쪽 경사면 위에 수영장이 있고, 그 옆 스탠드 위에는 테니스장이 있다. 경사면은 정원석과 나무들로 꾸며져 있는데 개나리가 많아 봄이 오면 노란 개나리가 만발했다. 개나리 가지가 땅까지 늘어져 그 안에 들어가면 밖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우린 여기를 개나리다방이라고 불렀다. 점심시간이면 그 안에 들어가 수다도 떨고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곤 했다.

  수영장은 여름에만 물을 넣고 체육시간에 수영을 했다. 몸치인 나는 6년 동안 수영을 배웠어도 수영을 못했다. 수영 잘 하는 아이들을 부러움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지금도 수영장 경로레인에서 제일 뒤에 따라가다가 앞사람이 되돌아오면 얼른 가다말고 돌아온다.

  스탠드에는 등나무 덩굴이 있는데 봄이면 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달리고 달콤한 향기가 가슴 가득 파고 들어온다. 꽃이 질 때는 스탠드 가득 보라색 꽃이 깔려 보라 카펫을 깐 듯하다. 이곳은 체육대회가 있으면 관람석이 되고 여러 가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앉아서 운동장을 바라보는 곳이다.

  그 위의 테니스장에서 방과 후에 테니스를 치곤했다. 테니스장 너머는 미국 대사가 기거하는 관저가 있다. 테니스를 치다보면 공이 대사관저로 넘어가곤 한다. 그러면 교문을 빠져나가 대사관저의 후문으로 가서 경비원에게 공이 넘어갔다고 말한다. 경비원은 싫은 내색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 공을 찾아다 우리에게 돌려주곤 했다.

  교문에서 정면 운동장 너머로 강당이 보인다. 입학식이나 졸업식도 하고 무용공연이나 음악회도 열리는 곳이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환상적인 분위기에 취했다. 무대에 선 아이들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나와는 먼 나라에 사는 아이들이라 생각했다.

  교문에 들어서 오른쪽에는 본관 건물이 있고 그 다음에 체육관이 있다. 체육관에서는 주로 무용 수업을 했는데 언젠가는 무용선생님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흐늘흐늘 늘어진 팔의 살을 보며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사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나이였는데 왜 그리도 나이 들어 보였는지. 무더운 여름에 소나기가 한바탕 내리면 흙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이 냄새를 맡으며 사람이 죽어 흙에 묻히는 것도 꽤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관 건물은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계단을 오르려면 사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래도 본관 건물 2층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기막히다. 수업 후 교실에 남아 공부하다 석양을 바라보면 회화나무 위로 러시아공사관이 보인다. 붉은 물감을 칠한 듯 타오르는 하늘을 배경으로 검게 선 공사관은 중세기의 한 성을 연상케 했다. 창문에는 귀부인이 내다보는 듯하고 밑에는 말 탄 기사가 있는 환상에 빠진다.

  이곳은 아관파천 때 고종과 세자가 1년이 넘도록 기거한 곳이다. 청일전쟁 이후 갈수록 커져가는 일본 세력에 대한 불안감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밤에 몰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격동기 세월의 아픔이 느껴지는 곳이다.

  하지만 본관 건물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화재로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목조 건물이라 미쳐 손 쓸 틈도 없이 잿더미로 변하고 회화나무도 이때 화상을 입어 본관 쪽으로 뻗은 가지가 타버렸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새 건물에서 지내는 것은 좋았지만 옛 정취는 사라졌다.

  모교는 그 후 개포동으로 이사 가고 이곳은 미국 대사관저의 보안을 이유로 아무 건물도 들어서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경비원들만 교문 앞에 보초를 서고 있다.

  텅 빈 운동장에 외로이 서 있는 회화나무가 애처롭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뛰어 놀던 모습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불타버린 가지가 많이 회복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쪽 가지가 작고 움츠러들어 불균형의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말없이 서있다. 우리가 있을 때는 이 나무 그늘에서 체육수업도 많이 했다. 수 십 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는데…….

  이 회화나무는 앞으로 얼마나 더 외로이 서 있어야할까? 언제 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을 수 있을까? 사람도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한다는데 이 회화나무도 마지막 걸음을 혼자 걷고 있는지 모른다. 텅 빈 교정과 쓸쓸히 서있는 회화나무를 볼 때마다 나의 소녀시절을 잃은 듯 가슴 속에 찬바람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