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모

2022. 4. 1. 백자영의 오케스트라 가곡

아~ 네모네! 2022. 4. 4. 17:01

1. 진행자 : 백자영교수

숙명여대 작곡과 졸업

독일 프라이부르크음대 수료.

오스트리아 그라츠음대 석사 졸업 후 ostgraduate 과정 이수

오스트리아 유텐부루크니 아티스트레지던스 선정

헝가리 바르톡 페스티벌에서 작품연주

 

2. 감상곡 : 오케스트라 가곡, 예술가곡

1) 슈베르트의 가곡

2)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의 가곡

3) 말러의 오케스트라 가곡

4) 작곡가 백자영교수의 가곡

 

3. 감상문

1) 슈베르트의 가곡

  슈베르트의 도플갱어는 그의 연가곡 백조의 노래에 나오는 곡이다. 백조의 노래는 슈베르트의 사후에 한 출판업자의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가곡이다.

  도플갱어는 (double+gang) 독일 전설에서 자신을 닮은 유령의 의미로 쓰인다. 또한 도플갱어는 죽음 직전에 본인 앞에 나타나는 생령(生靈)이다.

  이 곡은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인데 여기서는 달빛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슈베르트

 

2) 슈만의 가곡

  슈만과 클라라는 원체 유명하여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클라라도 작곡가 인줄 몰랐었다. 서로 작곡한 곡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다고 한다. 대학교 때 미팅에 가면 슈만을 뽑은 남자가 클라라를 뽑은 여자와 한 쌍이 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헌정이란 곡을 선물했는데 그 곡 중간에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살짝 끼워 넣은 것도 재미있다. 이 곡을 편곡한 리스트도 마지막에 아베마리아를 두 번 넣은 것이 흥미롭다.

  로베르트 슈만의 아버지는 서점 운영자이자 출판업자였다. 4년간 사립학교를 다닌 뒤 로베르트 슈만은 1820년에 츠비카우 고등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8년 동안 공부했다. 6세 때 처음 음악 공부를 시작하여 182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와 법적 보호자(그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음)의 강압으로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슈만은 법률 공부보다는 노래 작곡, 피아노 즉흥 연주, 리히터의 양식을 모방한 자전적 소설 쓰기 등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몇 개월 동안 로베르트 슈만은 프리드리히 비크라고 하는 당대 유명한 피아노 선생에게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비크의 9살 된 딸 클라라를 알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막 성공적인 연주회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1829년 여름 슈만은 라이프치히를 떠나 하이델베르크로 갔다. 마침내 183010월 어머니로부터 라이프치히에 가서 비크 교수와의 수련 기간을 가져도 된다는 허락을 얻게 되었다. 비크는 로베르트 슈만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고된 연습을 견뎌낼 수 있는 의지와 능력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비크의 제자인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과의 연애로 두 곡의 중요한 피아노 작품이 탄생되었다. 그 여자와의 연애는 1년 정도 지속되었지만, 헤어지기 오래 전부터 로베르트 슈만은 당시 16세였던 클라라 비크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1837913일 클라라의 18번째 생일에 슈만은 정식으로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비크에게 결혼 승낙을 요청했다. 비크는 로베르트 슈만의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하지 않고 회피했다.

  클라라가 경제적 불안을 이유로 결혼할 수 없다고 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가 여전히 결혼 승낙을 지연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행복한 상태는 아니었다. 1839615일 클라라의 공식적 언급으로 결혼 승낙을 얻어내기 위한 법적 소송절차를 밟게 되었지만, 계류상태로 1년 이상 지체되었다. 로베르트 슈만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비크 측의 항소가 있었고 상급 법정까지 올라갔지만, 비크 측이 슈만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는 데 실패하자 결국 1840912일에 두 사람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슈만은 정신병원에 입원을 자청했고, 다음날 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했다(슈만은 이미 1830년대에 적어도 3번 이상이나 자살을 기도했음). 그 후 본 근처 엔데니히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거의 2년 반을 지냈으며, 심한 정신 혼란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클라라는 1856727일까지 면회가 금지되었으나 마침내 종말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로베르트 슈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로베르트 슈만은 그녀를 알아보는 듯했지만, 2일 뒤에 죽기 전까지 거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슈만의 대표적인 피아노곡들 중에는 1840년 아내가 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을 위해 작곡한 곡들이 많다. 1856년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로베르트 슈만
클라라 슈만

3) 말러의 오케스트라 가곡

  말러는 특히 가곡의 영역에서 기존에 전형적으로 이뤄지던 피아노 반주에서 벗어나 혁신적이고 장대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의한 가곡인 오케스트라 가곡을 새로이 만들어냄으로써 리트 장르의 새로운 시대를 창조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근대음악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구스타프 말러 (독일어: Gustav Mahler 186077~ 1911518)는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립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유럽에서 공연 금지를 포함한 무관심의 기간을 겪은 후에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그 후 말러는 20세기의 작곡가들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가 작곡한 죽은 어린이를 그리는 노래는 애절한 느낌인데 이 곡을 만든 후 그의 딸이 죽었다고 한다. 의도적으로 대위적인 짜임새를 호모포닉한 짜임새와 대비시킨 오케스트라 연가곡 작품이다.

말러는 자신이 가사를 직접 쓰기도 했지만 특히 프리드리히 뤼케르트(1788~1866)의 시를 가사로 삼아 작곡하는 경우가 잦았다. 말러 이전의 작곡가였던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등도 뤼케르트의 시로 곡을 썼다. 하지만 이 시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것은 역시 말러를 통해서이다. 말러는 자신이 생전에 작곡했던 가곡의 절반가량에서 뤼케르트의 시를 가사로 사용했다. 특히 오늘날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뤼케르트에 의한 5개의 가곡><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가 대표적이다.

  가곡을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가사를 음미하는 일이다.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Kindertotenlieder) 중에서 나는 아이들이 잠깐 놀러 나갔다고 생각하지’(Oft denk’ ich, sie sind nur ausgegangen!)를 청중에게 자주 들려주곤 했다.

구스타프 말러

4) 백자영의 창작 가곡

  백자영은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을 매치시켜 새로운 음악을 작곡했다. 오케스트라에 가야금과 여창을 넣었는데 오케스트라의 음에 국악이 묻히는 것을 방지하려고 한 번씩 교대로 연주하게 하였다. 새로운 시도가 참신하다.

  가곡에는 오페라 가곡도 있고 오케스트라 가곡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강의를 마치고 회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는데 음악에 대해 일자무식인 나는 질문 내용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ㅠ ㅠ

회원들의 해박한 지식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