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壁)에 부딪친 벽(癖)
아 네모네 이현숙
사람마다 어딘가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다. 무엇인가에 꽂혀서 수집하는 수집벽도 있고, 남의 물건을 탐내는 도벽도 있다. 물건을 마구 사는 낭비벽도 있고, 결벽증도 있다. 어떤 사람은 구두에 관심이 많아서 몇 천 켤레를 사 모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옷에 관심이 많아 무수한 옷을 사들이는 사람도 있다. 그릇을 사 모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빈 박스를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가진 벽은 무엇일까? 특별히 어디에 애착을 가지지 않으니 나는 벽이 없나했는데 나도 한 가지 벽(癖)을 가지고 있다. 방랑벽이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머리 골치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된다. 그럴 땐 집 앞의 용마산에라도 올라가야한다. 우리 집에서 올라가는 길은 샛길이라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다. 주능선에 올라서도록 한 명도 못 만날 때가 많다. 산을 혼자 독차지 한 것 같아 기분이 흐뭇하다. 어쩌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애인을 빼앗긴 듯 허전하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산이 보이면 왼쪽 능선으로 올라갔다가 오른쪽 능선으로 내려오면 원점회귀 산행으로 딱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산에 길까지 낸다. 산 위에 가득 핀 하얀 상고대를 보면 그 위에서 걷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대학교 1학년 가을 학교 등굣길에 바라본 하늘이 어찌나 맑고 푸른지 갑자기 산에 가고 싶어졌다. 가방을 산악회실에 던져놓고 혼자 도봉산에 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산에 사람이 거의 없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데 웬 남자가 계곡에서 발가벗고 앉아있다. 물가 돌 위에 쭈그리고 앉아있으니 거시기까지 적나라하게 보인다. 갑자기 돌아내려갈 수도 없어 그냥 외면을 하고 올라갔다. 그 남자도 이런 날 누가 산에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나보다.
나는 등산이나 여행에 관심이 많다보니 TV를 볼 때도 세계테마기행, 걸어서 세계 속으로, 영상앨범 산, 한국기행, 주로 이런 걸 본다. 핸드폰 메모난에는 가고 싶은 해외여행지 목록, 가고 싶은 산 목록, 자매여행지 목록 등을 만들어 놓고 TV를 보면서 수시로 추가한다. 재력과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남아있는 시간도 점점 줄어드는데 가고 싶은 곳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이거 참 보통일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언젠가는 이 욕심을 버려야 할 텐데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남편이 작년 봄부터 불안증과 우울증이 생겨 혼자 있기 힘들어한다. 내가 없으면 현관문도 안 잠그고 산다. 급하면 119를 부르려고 열어놓고 산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쳐왔다. 나의 방랑벽이 하늘까지 치솟은 이 절벽에 부딪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지 않는 한 이 곤경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그칠 줄 모르는 방랑벽이 나의 목을 조른다. 벽(壁)에 부딪힌 나의 벽(癖)이 나를 힘들게 한다. 두 벽이 부딪치다보면 어떤 벽이 이길지 모르겠다. 남편이란 벽이 무너질지 내 방랑벽이 무너질지 둘 중에 하나는 무너져야 삶이 편해질 텐데……. 이왕이면 남편이 하루 빨리 건강을 되찾아 남편 벽이 무너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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