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시모

2022. 1. 21. 슈베르트

by 아~ 네모네! 2022. 1. 22.

1. 진행자 : 정난숙

 

2. 감상곡

미국의 크리스토퍼 누펜 감독이 만든 *슈베르트* 영화 2편 감상

1~ 피아노 5중주 *송어*

다니엘 바렌보임, 이작 펄먼, 핀커스주커만, 쟈클린뒤프레, 주빈 메타 (젊은 시절)

연주 장소: 퀸 엘자베스홀

2~ 가장 위대한 사랑, 가장 위대한 슬픔

고독한 천재 음악가 슈베르트가 베토벤 사후 20개월에 썼던 음악

'작품의 원동력은 깊은 슬픔

 

3. 감상문

* 슈베르트의 생애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리히텐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는 리히텐탈에서 초등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장인의 딸로 요리사였다. 무려 16명이나 되는 자식들에서 13번째로 태어난 슈베르트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즐겨하던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6살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큰형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취미나 여가활동, 학교 교사로서의 교육 수업 차원에서 음악을 가르친 것이었지 슈베르트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고 학교 선생을 시키려고 했으나, 슈베르트는 음악가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 탁월한 미성을 가지고 있었다. 11살 때(1808) 스타드콘빅트 (궁정 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에 빈 궁정 예배당의 아동 합창단에 뽑혔다. 슈베르트는 그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했는데 특히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슈베르트에게도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악보를 볼 때 너무 가까이서 본다는 것이었다. 이에 부모님은 슈베르트의 시력이 나쁘다는 것을 알아채고 안경을 맞춰 주었고 이 때문에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안경을 쓰고 음악 공부를 했다.

  탁월한 미성으로 독창회에 나가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급히 집으로 갔으나, 어머니는 이미 숨진 뒤였고, 그제서야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원한다면 음악가가 돼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게다가 13세에 변성기가 되자 특유의 미성은 사라졌고, 이에 따라 합창단에 머무를 수가 없는데다 수학과 라틴어 성적도 나빠서 결국 학교를 나와야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법은 징병제였기 때문에 일정 연령이 된 남성은 군대를 가야 했다. 당시 슈베르트의 입장에서 군대를 안 가는 유일한 방법은 학교 선생이 되는 것뿐이었다. 음악 쪽으로 진로를 삼고 싶었던 슈베르트는 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이 내키지 않았으나 군대를 가고 싶지 않아서 결국 1814, 17세 때부터 아버지의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하면서 저학년의 수업을 담당했다. 이 해에 슈베르트 최초로 발표된 큰 작품인 F장조의 장례미사곡을 작곡했는데 이때 독창을 맡았던 한 살 아래의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슈베르트는 아버지와의 대립으로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빈으로 나와서 친구인 프란츠 폰 쇼버(1798 ~ 1882)와 함께 살면서 작곡에 열중했다가 쇼버의 동생이 외국에서 돌아오자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818,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여름 동안 음악 가정교사를 구했는데, 슈베르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음악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슈베르트는 고향집을 완전히 떠나 개인 레슨을 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나그네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23,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를 작곡했고 가곡 '방랑자'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피아노용으로 작곡한 '방랑자 환상곡'을 내놓기도 했다.

  1827, 슈베르트는 경제적 어려움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함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다. 이 해에 그는 평소 가장 존경하던 베토벤이 죽기 1주일 전 짧은 만남을 가졌다. 이때 자신이 작곡한 작품 중 몇 곡의 악보를 베토벤에게 소개하자 베토벤은 그의 음악에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의 우상이 병들고 초라해진 모습에 더 일찍 베토벤을 만나러 오지 못한것을 많이 후회해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베토벤과의 만남을 끝내고 말았다. 이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는 베토벤 항목에도 소개되어 있다. 바로 1주일뒤에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자 슈베르트는 크게 슬퍼했고, 베토벤의 관을 운구하는 음악가들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한편 베토벤 사후 슈베르트의 음악가로의 진로를 반대하며 학교 교사를 강제로 시키려던 아버지와 슈베르트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집안의 형제들과 슈베르트의 주변 친구들이 슈베르트가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칠 무렵 슈베르트의 아버지를 설득하자, 아버지는 아들이 작곡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고 아들을 용서하면서 마침내 두 부자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화해도 잠시, 슈베르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형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 요양 치료를 받았다. 병명은 티푸스, 매독, 식중독 등 설들이 다양한데, 확실히 밝혀진 건 없다. 그 뒤 슈베르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말년에 슈베르트는 헨델의 '메시아' 악보를 구해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죽기 불과 1년 전에야 피아노를 장만했다. 다시 말해서 이전까지는 피아노도 없이 작곡을 했다는 얘기. 이것을 두고 악기를 전혀 연주해 보지 않고 '머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쓴 것'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다른 악기인 기타를 갖고 있었고, 이걸로 악상을 연주해 가며 작곡했다고 한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병세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8281119일에 혼수상태에 빠진 슈베르트는 공무원이던 둘째 형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31살이라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위대한 작곡가의 삶을 마감했다. 혼수상태였을때 슈베르트는 "묻혀지는...... ... 싫어... 홀로 있는 건 싫어......" 라고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페르디난트가 "프란츠, 모두 널 걱정하여 모였단다. 걱정 마라."고 말하자 갑자기 그는 하지만, 여긴 베토벤이 없어!”라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존경하던 이의 이름을 외친 모양. 그리고 그렇게 숨을 거두면서 그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이때 임종을 지켜본 친구 슈빈트는 형 페르디난트가 갓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을 만지며 한참을 울었으며 "너무 일찍 갔구나, 프란츠. 너무나도 일찍 갔어!" 라며 슬퍼했다고 회고했다.

  사후 슈베르트의 바람대로 형 페르디난트와 친구들이 시신을 그가 그토록 존경하던 베토벤이 묻힌 빈 벨링크 공동묘지에서 영면할 수 있도록 손을 써주었고, 베토벤의 바로 옆에 안장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쇼버에게 생을 마감하기 1주일 전인 18281112일에 보낸 편지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인데, 여길 봐도 그의 마지막 당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잘 있었어? 나는 너무나도 아프다네. 고열과 어지러움이 계속되고 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드네. 먹을 것을 먹는 즉시 토해버리고 열하루째 물만 마시고 있어.

  그나마 페르디난트 형과 린나(누이동생)가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있어줘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간혹 좀 낫기도 하고 그러면 책을 읽고 있다네, 지금 마지막 모히칸이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네. 이 책의 작가인 쿠퍼가 쓴 다른 책이 있으면 좀 빌려줄 수 있겠나?

자네의 친한 친구인 프란츠가

18281112

 

  슈베르트는 겨우 31살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무려 998개의 작품들을 작곡할 만큼 다작가였다. 작품성을 떠나 그의 작품 대다수가 매우 아름다운 선율을 자랑하는데, 당시 슈베르트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정말 머릿속에서 쉴새 없이 멜로디가 솟아나왔다고 한다.

  인간적으로 슈베르트는 좀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특히 그의 외모도 당대 사람들이 보기엔 못생긴 외모였고 고수머리에 숏다리에다가 단신(156cm)이라 여자들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사실 어렸을 때에는 꽤 미남형이었으나 젊었을 때 너무 고생을 해서 얼굴이 많이 망가졌다고 한다. 실제로 슈베르트의 청소년기 얼굴 스케치로 알려진 작품을 보면 곱상한 미남형 얼굴이다. 맨 위에 나온 그림을 보면 얼굴이 왜 이리 퉁퉁 부었지?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돈이 없어서 팔다 오래되어 소금을 뿌리고 떨이로 파는 것들이나 사먹다보니 콩팥에 이상이 있어 몸이 퉁퉁 부었기에 얼굴도 저렇게 부은 거였다.

  평상시 여자에게 인기가 없던 슈베르트는 쇼버의 집에서 잠시 묵었을 때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빈의 밤을 즐기기도 했으나 이 때문에 슈베르트가 매독에 걸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 느낀 점

  슈베르트는 31살에 요절했다. 천재는 왜 이리도 빨리 죽을까? 너무 활활 타오르기 때문에 단시간에 초가 다 닳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송어는 학교 다닐 때 합창경연대회를 하면 항상 나오는 단골 메뉴였다. 음악계 거장들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어 참신했다.

  가장 위대한 사랑, 가장 위대한 슬픔은 슈베르트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영화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상처받고, 가장 큰 슬픔을 맛보는 게 아닐까? 가장 큰 슬픔이 가장 위대한 작품을 낳는 원동력인가보다.

 

'클래시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 2. 18. 스파르타쿠스  (0) 2022.02.21
2022. 2. 4. 리골레토  (0) 2022.02.04
2022. 1. 7. 베토벤을 찾아서  (0) 2022.01.08
2020. 11. 20. 클래시모 송년회  (0) 2020.11.20
2020. 5. 29. 쥐뿔도 모르면서  (0) 2020.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