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3. 10. 25. 가도 가도 왕십리

아~ 네모네! 2013. 10. 28. 14:44

가도 가도 왕십리

 

아 네모네 이현숙

 

  김소월의 시 왕십리에 보면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라는 구절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 후 새 도읍지를 정할 때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찾아 이곳저곳 헤매던 중 왕십리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여기서 ‘10를 더 가라는 노인의 말에서 왕십리(往十里)’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왕십리에서 십리를 더 간곳이 바로 조선왕조의 도읍지 한양이다.

  종로 5가에서 살다가 아버지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왕십리의 청계천 변으로 이사를 갔다. 천변에는 허름한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고 비가 오면 북악산 인왕산 남산에서 내려오는 빗물이 모여 누런 흙탕물이 무섭게 흘러 내려왔다.

  가끔씩 돼지나 닭, 가재도구들도 떠내려 왔는데 둑방에 올라가 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구경 중에 으뜸은 물 구경, 불 구경, 쌈 구경이라 하지 않던가? 물 구경하다가 긴 장대를 들고 떠내려가는 물건을 건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건져낸 사람은 횡재라고 한 듯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해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갔다.

  떠내려가는 돼지를 보며 저게 한강을 따라 바다까지 가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곤 했다. 물고기가 다 뜯어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근처에 검정다리라고 하는 다리가 있었다. 왕십리와 용두동을 잇는 다리인데 검은 아스팔트를 칠해 놓았다. 내가 다닌 사범대학이 제기동에 있어서 이 다리를 건너 학교에 다니곤 했다. 겨울이면 찬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 얼어붙는 듯했다.

  그 후 청계천은 복개되어 땅 밑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뜯어내어 햇빛을 보는 등 파란 만장한 생을 살게 된다. 지금은 한강에서 물을 끌어 인공적으로 항상 물이 흐르게 하고 천변도 깔끔하게 정리하여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되살아났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왕십리 산다고 하면 똥파리라고 놀려 왕십리 산다는 말하기가 싫었다. 도성 안의 똥을 퍼서 여기서 처리를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얻은 별명이다. 내가 이사 갔을 때는 오물처리장이 한양대 뒤편의 청계천 하류로 옮겨진 후였다. 하지만 똥파리라는 별명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지금은 왕십리가 교통의 요지로서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하였다.

  청계천은 한양대 뒤에서 중랑천과 만나고, 중랑천은 응봉동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청계천 상류인 종로 5가에서 살다가 청계천 하류의 왕십리로 이사 오고, 결혼하여 중랑천 옆 면목동까지 내려왔는데 다시 이사를 한다면 한강까지 흘러가려나?

  무학대사가 본 왕십리는 어떤 모습이고, 가도 가도 왕십리라고 노래한 소월의 눈에 비친 왕십리는 어떤 곳이었을까? 초등학교 3학년부터 결혼 전까지 내가 살던 왕십리는 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지지고 볶아대며 아우성치던 치열한 삶의 전쟁터였다.

앞으로의 왕십리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