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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2. 9. 고양누리길 10, 11코스

아~ 네모네! 2023. 12. 10. 16:26

고양누리길 10코스(견달산누리길)11코스(송강누리길)을 걸었어요.

풍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고봉동행정복지센터에서부터 걸었어요.

고봉행정복지센터-견달산사격장-사리현은행안길-분기점-쥬쥬테마공원-월산대군사당-메타세콰이어길-공릉천문화체육공원-필리핀참전비까지 걸었어요.

여기서 30번 버스를 타고 구파발역으로 왔어요.

견달산에는 이런 역사가 서려있네요.

 

고려의 제31대왕이었던 공민왕에게는 왕비가 다섯이나 있었으나 모두 소생이 없었다. 오직 스님이었던 신돈의 청에 의해 간택된 여섯째 부인인 반야에게서 아들이 생겼는데 그가 제32대 우왕이다. 이미 원나라에 의해 국권이 침탈된 고려는 이나 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한낱 변방의 부마국(원나라 임금의 공주와 결혼해 사위국이 되는 것)으로 전락해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처지가 돼 버렸다.

공양왕 무덤으로 전해지는 고릉(高陵)으로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능 앞에는 왕과 왕비가 승하했다고 전해지는 연못이 보인다.

석양노을처럼 나라의 명운이 기울자 신흥 무인세력들은 왕조를 업신여기기 시작했다. 공민왕의 대를 이었던 우왕(32)과 창왕(33)을 몰아내 버렸다. 대신 제20대 임금이었던 신종의 6대손인 공양왕을 옹립했다. 이 또한 알량한 눈가림식의 명분에 불과했다. 공양왕은 나이가 45세에 보위에 올랐다. 원래 성격이 우유부단 한 데다가 원하지 않은 임금자리에 올라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로부터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고려사>에 보면 공양왕은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날 밤 너무 근심이 되어 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왕위에 오르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일평생 입을 것 먹을 것과 시중할 사람이 모두 풍족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렇게 중대한 책임을 지게 되니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다.”

이성계 일파인 신흥 사대부들은 공양왕 재위 기간 중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이른바 과전법(科田法)’이다. 이는 기존 권력자들, 즉 기득권 세력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신흥 세력들이 경제 기반을 닦는 데 활용됐다. ‘과전법을 시행할 때 토지 문서를 모두 몰수하여 불태웠다. 산더미 같은 문서들이 사흘 밤낮 동안 타올라 개성 하늘이 연기로 가득했다고 한다.

공양왕은 그 연기를 보며 고려왕조의 몰락을 예감하며 남몰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공양왕은 재위 28개월 만에 이성계에게 양위해야만 했다. 역성혁명으로 고려왕조가 막을 내리고 이때부터 조선왕조가 시작된 것.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왕()씨들은 이성계 일파의 후환이 두려워 전(), (), (), ()씨 등으로 성을 바꾸기까지 했다. 패주가 된 공양왕은 개성을 떠나 파주를 거쳐 현재 고양시 견달산에 이르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이 됐는데도 백성들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구나.”

행색이 남루할 대로 남루해진 공양왕은 왕비와 함께 하룻밤을 유숙할 곳을 물색해 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하게 식은 민심뿐 어디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날은 저물고 사방은 어두워졌다. 공양왕은 힘없이 동행한 신하들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저기 건너편 골짜기에 한 가닥 불빛이 보이니 그곳에 가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도록 부탁을 해 보거라.”

신하가 종종걸음으로 불빛이 반짝이는 곳을 찾아가 보니 사찰이 있었다. “이 보시오. 스님. 우리는 고려 공양왕을 모시는 일행들이오. 오늘은 하루 종일 걸어 파주를 지나왔소. 날도 저물어 갈 데도 없으니 하룻밤 머물 수 있도록 해 주시구료.”

문을 열고 나온 스님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자리가 누추하고 비좁기는 하지만 그리하시지요.”

견달산으로 돌아온 신하는 임금 일행을 모시고 사찰에 몸을 풀었다. 비록 멸망한 왕조의 임금이라 백성들로부터도 외면당했지만 스님들은 나름대로 자비를 베풀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임금을 폐위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파 일행은 혹여나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우려해 패주의 뒤를 밟다가 때를 기다려 시해하려는 계략을 꾸몄다. 그래서 보부상으로 위장한 자객 일행을 파견했다. 이 소문은 머지 않아 견달산의 한 사찰에 전해졌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공양왕 일행은 다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러자 이쪽 지리에 밝은 스님들은 사찰 인근 고개에 누각이 있음을 알려주고 그곳을 은신처로 삼을 것을 권했다.

자객들의 위협을 피해 공양왕 일행들은 다락골 누각으로 은신했다. 짐을 내린 신하들은 가지고 온 옷가지로 바람을 막아 임금부부의 침실을 만들었다. 공양왕은 함께 데리고 온 삽살개를 보듬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면서 하룻밤을 보냈다. 공양왕 일행은 다음날 날이 밝아도 희망이 없었다. “어디 숨을 데도 마땅히 없구나!”

처량한 신세가 된 이들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전하. 계시옵니까?” 조심스럽게 문을 연 신하들은 이내 며칠 머물렀던 사찰의 스님임을 알았다. “어서 오세요. 스님들.” 문을 열고 들어온 스님들은 지게를 지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 . 전하께서 드실 수라상이오. 우리 스님들이 기름진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마련한 음식이니 전하께 올려주세요.”

아이고, 스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신하들은 임금을 대신해 감사의 뜻을 전하고 또 전했다. 수라상을 받아 든 공양왕 부부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렸다. 스님들은 세인들의 눈을 피해 끼니때마다 음식을 계속 날라다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락골 누각에 소동이 일어났다.

식사동의 유일한 조계종 사찰 길상사.

전하께서 보이시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난 신하들은 견달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양왕 부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셨을까? 혹시 이성계가 보낸 일당들에게 해를 입지는 않았을까?” 온갖 불안한 생각들이 교차하면서 한 나절이 흘러갔다. 신하들은 이곳저곳을 헤매고 또 헤매며 임금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날이 저물고 달이 떠도 임금부부는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하루가 지나고 새날이 밝았다. 그런데 앞 산 언덕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저 소리는 전하께서 데리고 다니시던 삽살개 소리가 아닌가?”

맨발로 우르르 달려가 보니 삽살개가 연못 앞에서 컹컹거리고 있었다. “수상하다. 혹시 전하가 이 연못 안에 계시는 것은 아닐까?” 연못 안을 찬찬히 살펴보던 한 신하들가 소리쳤다. “저기 전하와 중전마마가 계신다모두들 연못 안을 들여가 보니 그 곳에는 공양왕과 왕비가 아주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전하!” 신하들은 일제히 엎드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부랴부랴 물을 퍼내 보니 공양왕과 왕비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신하들과 마을 사람들은 패주 공양왕의 승하를 슬퍼하며 견달산 기슭에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공양왕이 머물렀던 고개를 대궐고개라 불렀다. 또 왕이 잠을 잔 곳(御寢)이라 하여 어침으로 부르다가 와전되어 언침이라는 마을도 생겼다. 고양시 식사동의 유래 역시 공양왕의 음식을 스님들이 날라준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식사동(食寺洞)’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양왕은 이성계파에 의해 삼척에 유배되었다가 1394(태조 3)에 살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래서 공양왕의 릉은 지금 삼척 궁촌리에도 있다.

세종 19년에는 안성군 청룡사에 있던 공양왕의 어진을 고양현의 릉 옆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삼척에 있었던 무덤이 고양시로 이장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공양왕릉은 왕릉이라기에는 매우 소박하다. 한때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양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고릉(高陵)은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으며 사적 제191호로 지정돼 있다. 왕과 왕비가 묻힌 쌍분인 고릉은 조선조 고종 때 세운 고려 공양왕릉이란 석비와 함께 석상, 장명등, 석인, 석호 등도 있어 왕릉 형식을 갖추고 있다. 왕과 왕비의 시신을 찾아 주었다는 삽살개 석상도 봉분 앞을 지키고 있어 참배객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왕릉 앞에는 작은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유래를 적어 놓았다.

사찰의 스님들이 날라다 준 공양에서 유래된 고양시 식사동에는 동국대학교 일산불교병원이 위치하고 있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있다. 스님들이 밥을 날라다 준 견달산의 사찰은 찾을 수가 없고 대신 식사동에는 길상사가 조계종 사찰로는 유일하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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