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100일 간의 세계일주 20

아~ 네모네! 2025. 2. 9. 05:56

2월 8일 항해 1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발파라이소로)

구글 지도를 보니 마젤란 해협을 거의 빠져 나왔다.

   아침 식사를 하러 14층에 가서 밖으로 나가 보니 무지개가 떴다. 트릿하니 껄렁하다. 바닥을 보니 푹 젖었다. 비가 많이 왔나 보다.

   오전에는 아무 스케줄이 없어 갑판을 돌고 널널하게 지냈다. 클래시모 카톡방에 올라온 글을 보고 내 블로그에도 올렸다. 100일 간의 여행 중 제일 아쉬운 것이 클래시모 모임에 못 가는 것이다. 뭔가 목마른 느낌이다.

    점심 식사 후 7층으로 내려가니 갑판 출입 통제다. 12층에 가니 열긴 열었는데 바람이 엄청 세다. 흡연 코너에는 사람들이 8명 나와 있다. 흡연자들 때문에 열어준 게 아닌가 싶다. 방에서 피우다 불이 나면 대형사고가 터질 테니 말이다.
  마젤란 해협을 다 빠져 나왔는지 사방 팔방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섬 쪼가리 한 개도 없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면 대륙도 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메리카섬, 유라시아섬, 호주섬, 남극섬이라고 해도 될 거 같다. 대륙과 섬은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지 모르겠다.
  3시 15분에 하는 '파타고니아의 연어 양식 산업'을 들으러 30분 전에 갔더니 먼저 강의가 안 끝났다. 오늘 신문에 통로에 앉지 말라고 해서 서둘러 왔더니 만사 여의치가 않다. 그래도 일본 춤 구경했더니 좋다. 이 팀의 강사가 열정이 넘쳐 늦게 끝나는 바람에 20분 이상 지연 됐다. 결국 30분이나 늦어졌는데 안내 방송도 없다. 나중에야 선내신문에 시간이 잘못 나갔다는 방송이 나온다. 열 받는다.
  피터 하트만씨의 강연이다. 그는 칠레의 환경보호 활동가다. 파타고니아 피요르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연어 양식 산업이 해양생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애기했다.

    자신이 사는 아이센 지역에 맞춰서 얘기하겠다. 30년 간 조사한 결과다. 이곳은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이센 해안선은 7000km 이상이다.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다. 우리가 탄 배도 여기를 지날 것이다. 코르코바도만에는 대왕고래와 긴수염고래도 많다. 산호섬도 있어 이산화탄소 흡수율도 크다.
  이 주황색 점들은 연어 양식장이다. 자연보호구역 안에도 많다. 라구나 산 라파엘 국립공원에도 양식장이 있다. 왜 국립공원에 양식장을 지었을까. 환경 영향 평가서를 냈지만 기각됐다.

   막달레나 국립공원에도 양식장이 있다. 양식장 그물에 걸려 죽은 긴수염고래도 보인다. 플라스틱을 대량으로 먹어서 죽었다.

   고래의 무덤으로 변했다. 작년 10월에 봤을 때는 멀쩡했었다. 육지에 올려 조사했더니 피부에 많은 상처가 있었다.
  해안가에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많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심각한 수준이다. 정부에서는 양식업자들에게 쓰레기를 치우라고 했다. 다앙한 정부 관계자들이 방문했다. 그 후 해안에 쓰레기가 없다고 발표해지만 실제로는 많은 쓰레기가 있었다. 30km 떨어진 양식장에서 내려온 것이다. 연어 양식장에는 많은 고래가 산다. 죽은 연어를 저장하는 통도 있다. 죽은 연어를 처리하기 위해 화학약품을 쓴다.
  10년간 수중 촬영을 하며 연구했다. 10년 후 많은 생물이 죽었다. 연어 양식장에서 연어의 배설물, 먹이, 항생물질 등이 버려지기 때문이다. 전염병이 퍼질 수 있어서 항생제와 기생충약을 먹인다.
  연어양식은 환경, 인권, 노동 문제도 일으킨다. 선주 민족들이 자신들의 보호를 주장하기도 했다.
  남극의 크릴을 많이 포획하여 연어에게 먹여서 연어살이 핑크빛이다. 칠레도 크릴을 포획하는데 실제는 스페인 회사다. 엠디페스라는 회사도 일본이 주인이다. 고래보호구역에서도 크릴 포획이 이루어져 고래들이 배에 부딪쳐 죽거나 그물망에 걸려 죽는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주변 사람들에게 칠레산 양식 연어를 먹지 말라고 할 수도 있다. 크릴새우 잡이 회사에게 보호구역에서 철수하라고 할 수도 있다.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연어 양식장을 가지고 있고 또 연어를 수입하고 있다며 강연을 마쳤다. 오늘은 달랑 강연 한 개 들었다. 껄렁한 날이다.
  금형씨는 오늘 선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거금 5만원이다. 우리 동네 가서 자르면 만 오천원인데 너무 비싸다. 나는 버틸 때까지 버텨봐야겠다.

2월 9일 항해 2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발파라이소로)

    속이 아파서 새벽부터 깨서 몇 시간 뒤척였다. 설사가 낫지도 않고 2주간 약을 먹었더니 위장까지 아프다. 오늘부터는 위장약을 먹어야겠다.  2023년에 지은 약이니 효과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금형씨는 자기 집에 와 있는 언니가 꽃이 핀 사진을 보내 왔다며 기뻐한다. 언니가 꽃을 잘 키웠나 보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건강한 모습은 보는 이를 기쁘게 한다.
  요가하는 중에도 졸음이 온다. 대충하고 방에 와서 쉬었다. 방의 전화가 울려 받아보니 금형씨다. 허선행씨가 장염약을 준다고 8층으로 오란다. 선행씨는 이름이 선행이라 선행을 많이 하나 보다.
  쉬고 있는데 방송이 나온다. 오늘 대피 훈련을 하니 7층 대피소로 오라는 것이다. 7층으로 내려가니 아이디 카드를 찍고 레전드바로 들어가란다. 여기 읹아서 기다리니 방송이 4개 국어로 나오면서 구명 보트 착용하는 방법을 네 번 설명해 준다. 한국말도 해주니 좋다.

   다음은 피스보트 스텝 유스케씨가 하는 발파라이소 기항지 설명회를 들으러 갔다. 발파라이소라고 하면 뭔가 발파될 것 같다. 요스케는 피스보트 전체 사회 보는 사람이고 유스케는 기항지 설명회 하는 사람이다. 헷갈린다.

   지난 번에 한 것인데 악간 다른 점도 있다고 해서 또 들었다. 칠레는 70%가 산맥이다. 기온은 16~20도다. 페소와 달러가 통용된다. 컬러플한 건물이 많다.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됐다.
  발은 골짜기란 뜻이고 파라이소는 천국이란 뜻이다. 즉 천국의 골짜기다.
  빈야델 마르는 휴양지다. 쁘랏부두는 파나마 운하가 생기기 전까지 최대의 항구였다. 쁘랏부두에서 빈야델 마르까지는 전철로 세 정거장이다. 항구에서 셔틀버스 타고 전철역까지 갈 수 있다.
  아센소르는 스페인어로 엘리베이터라는 뜻이다. 1855년에 최초로 개설되었다.
  빨간 점으로 표시된 소토마요르 광장은 전철역에서 항구 쪽으로 와야한다.

   선원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있다. 위 사진에서 1번은 콘셉시온 언덕인뎨 벽화가  좋다.

   2번은 알레그레 언덕인데 카페가 많다.
3번은 바부리사궁전 미술관인데 바부리사는 크로아티아인이다. 그의 저택이었다.
국회 의사당도 볼만 하다. 산티아고에서 이리로 이전했다.
  파블로 네루다의 저택은 네루다가 직접 설계한 집이다. 입장료가 있다.

   벽화가 곳곳에 많다. 하지만 언덕 위는 치안이 불안하다. 계단도 예쁘고 일본 여인 그림도 있다.
  그 외에 기념품과 와인, 맥주, 음식 소개도 했다. 발파라이소에는 소매치기가 있다.언덕 위는 빈민가라서 주의해야한다는 말로 설명회를 끝냈다.
  다음은 치히로의 칠레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칠레에는 아라우칸족이 있었다. 그들이 최후까지 스페인과 맞섰다. 칠레는 남북 길이가 일본의 두 배. 좁은 곳은 100km도 안 된다.
  칠레에서 8천년 전 미라도 봤다. 거기서 고래뼈도 나왔다. 미라 얼굴에 토기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칠레 사람들은 인생에 감사하는 노래를 많이 부른다. 성실함은 일본 사람을 닮았고, 주장을 관철하는 강인함은 한국인을 닮았다.
  아옌데 대통령은 아기들에게 분유를 무료로 제공했다.

   농지개혁도 하고 구리광산을 국영화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미국이 소유한 것을 빼앗자 반발했다. 미국이 기업을 파업하게 만들어 경제를 파탄시켰다. 미국의 주도하에 쿠데타도 일어났고 대통령궁도 폭파 되었다. 아옌데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마지막 방송을 하고 총으로 자살했다.
  쿠데타 정권은 국민가수 빅토르 하라도 학살 했고 120만 명이 해외로 망명했다. 미국은 자기 나라의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면 다른 나라의 독재에는 관심이 없다. 신자유주의제는 빈부차가 심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동경하며 일하게 된다.
  군부 정권은 국외 망명자도 찾아서 죽였다. 1984년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취재를 갔는데 공항에 군인들이 깔려 있었다. 기자라고 하자 별실로 끌려갔다. 반 군정에 대해 안 쓴다고 하자 호텔로 보내줬다. 다음 날  반 군정 집회가 열린다고 하여 나갔더니 사람이 없었다. 한 할아버지는 벤치에서 신문을 보고 할머니는 비들기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젊은 커플은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대성당에서 종이 울리자 할아버지는 신문을 던지며 반 군정 타도를 외치고, 비들기 모이를 주던 할머니는 민주주의를 외쳤다. 애정 행각을 벌이던 커플도 시위대가 돠었다. 그러자 헬기에서 사린 가스를 뿌렀다. 물폭탄과 사린 가스가 카메라에 떨어졌다. 자기도 사린가스를 맞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군인들은 시위대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갔다. 결국 300명 시위대는 진압 됐다. 경찰과 군인들이 상점까지 들이닥쳤지만 상점 주인이 셔터 안으로 시위대를 숨겨주었다.
  사람들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불렀다.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청년들은 실업자였다. 십자가 엽서에는 만약 빵이냐 자유 중 하나를 택하라면 우리는 빵을 얻기 위한 자유를 택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밤 8시 이후에는 모이지 못 하게 하자 주부들은 냄비를 두드리며 시위했다. 어둠 속에서 문을 살짝 열고 두드렸다. 사방에서 들리는 이 소리를 들으며 더 큰 소리로 번지게 되었다.
  다음 날 한 잡지에  반 정부 시위 사진이 실려 있었다. 편집부 주소를 따라가 보니 교회였다. 편집자는 잡혀가고 50대 여성인 부 편집장이 있었다. 군사 정권이 만든 헌법에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되어 있다며 출판의 자유가 있다고 소송했다. 편집장은 감옥 안에서 반 정부 기사를 쓰고 있었다. 다음 호에 그 기사가 실렸다. 중앙에 있는 사람이 편집장이다. 잡혀가는 사진이다.

 

치히로는 그에게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쓴 넥타이를 선물 했다. 하지만 그 후 옥사했다. 그 넥타이를 다시 가져와 지금까지 쓰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넥타이가 그것이다.
  카톨릭 신부들이 독재 반대에 앞장 섰다. 한국도 같은 시대에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그 후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했다. 사진은 전단지다.

   교황은 빈민가를 방문했다. 운동장 잔디밭 한 가운데 교황이 섰고 젊은이가 8만명 있었다. 청년에게는 군사 정권이 준 환영사가 있었지만 읽을 수 없었다. 대신 군 정권을 반대하는 말을 했다. 답사에서 교황은 사회적 정의라는 말을 열 두번 했다. 절은이에게 사회적 혁명을 일으키라고 했다. 이것은 1987년에 있었던 일이다. 1988년 국민투표가 있었다. 1980년 이후 모든 언론을 장악했기 때문에  군정 유지를 묻는 것에 찬성표가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17개의 야당이 연합하여 여당을 이겼다. 야당은 주어진 15분 동안 민주주의의 좋은 점을 광고했다. 소풍 나온 가족과 거리에서 없어진 경찰의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승리했다. 그 후 첫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 그녀는 두 번 집권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사 정권에 반대하다 옥사한  군인이었다. 군 정권의 피노체트 대통령은 병에 걸려 스페인 병원에 입원했지만 체포된 후 송환되어 재판을 받았고 재판 중인 2006년에 병사했다. 2021년 35세의 좌파 가브리엘 브릿지 대통령이 당선 됐다. 지금도 좌우세력이 대립하고 있다. 발파라이소에는 군 건물이 많다. 해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곳이 발파라이소다. 나는 여기서 고문을 받았다고 시위하는 할아버지도 보았다. 그 후 남미 출신 프란체스코 교황도 방문했다.
  이 강연에서 달랑 두 명 놓고 수화로 알려주는 직원도 보인다.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는 주최측이 존경스럽다.

   자리가 없어서 제일 앞쪽 코너에 앉았더니 멀미가 나서 토할 뻔 했다. 방에 와서 무조건 누웠다.
  오늘 영어교실, 일본어 교실, 살사는 다 빼먹었다. 한잠 자고 일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유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러갔다.
30분 전에 갔는데도 입장하려는 줄이 엄청 길다. 마지막 공연이다.
  첫 곡은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다. 도니체티의 사랑의 엘레시는 귀에 익은 곡이라 더 좋았다. 푸치니의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와 비제의 카르멘 중 '하바네라'도 연주했다. 아는 곡이 많이 나오니 좋다. 하지만 성악곡은 사람의 소리로 들어야 제 맛인데 약간 아쉽다.
  푸치니의 트란도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도 클래시모에서 듣던 곡이다. '오 솔레미오'도 연주했다.
  그 유명한 에바 페론의 이야기를 담은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요.'도 연주했다. 장옌과 함께 '하나와 사크'라는 곡도 연주 했다. 피아졸라의 이베르 탱고로 연주회를 끝냈다.

   하루 종일 멀건 죽만 먹었더니 골이 핑핑 돈다. 90세 할머니는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는데 나도 얼마나 버틸지 겁난다.

2월 10일 항해 3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발파라이소로)

  3일째 비바람이 몰아친다. 사람들이 좀비처럼 걸어다닌다. 식판을 들고 다니기 힘들다. 요가도 휴강이다.

    5층 카페 유리창에 뭐가 와서 부딪쳤는지 유리가 깨지고 물이 들어와 한강수가 됐단다. 직원들이 청소 하느라고 난리가 났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니 찍지 말고 빨리 들어가라고 했단다. 지금까지 중 최고로 요동이 심하다. 드레이크 해협만 걱정했더니 이건 완전 드라큐라 해협이다.
  잠시 후 5층 아트리움과 리셉션은 폐쇄되었으니 긴급상황이 있으면 5000번으로 전화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방 청소도 안 해주고 엘리베이터도 안 움직인단다.
  할 일이 없어 김솔의 단편소설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를 읽었다. 런던에 밀입국한 시에라리온 청년 바이 부레의 이야기다. 그는 천 달러를 콘돔에 넣어 항문에 숨겨 가지고 왔다.
  터무니 없지만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파헤친 글이다. 책으로 읽는 것보다 흰구름이 읽고 얘기해주는 게 더 재미있다. 흰구름은 춤 솜씨도 좋지만 말 솜씨는 더 좋다.
  오늘이 자주 기획 중간 발표회라고 해서 8층예 가보니 이것 저것 그 동안 만든 것들을 전시해 놨다. 참 재주들도 좋다.

    할 일도 없으니 오후에는 빨래를 했다. 오늘은 동전 하나를 더 넣고 건조까지 해오니 훨씬 간편하다. 빨래줄 맬 일도 없다.
  빨래를 마치고 12층과 14층 갑판을 걸었다. 여기는 통제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걷다보니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인다. 바닐라는 무료다. 진작 좀 먹어 볼 껄 그랬다. 지금은 기침이 나서 줘도 못 먹겠다. 금형씨와 흰구름은 8층으로 공짜 피자를 먹으러 갔다. 아직 속이 시원치 않으니 이것도 못 먹는다. 뭐든지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한다. 언젠가는 물도 못 삼킬 것이다.

    걷다 보니 바닥에 숫자가 쓰여있다. 무얼 하는 판인지 모르겠다. 무슨 놀이를 하는 것 같다.

   배가 춤을 추니 구름도 둥실 둥실 춤을 춘다. 갑판 의자에 앉아 구름을 바라보니 전후 좌우 위 아래로 발레를 하는 것 같다. 흰구름은 구름을 닮아서 춤을 잘 추나 보다. 살사, 지루박, 왈츠, 기타 등등 못 하는 게 없다.

   오늘도 14층에 올라가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배 안에서 가장 활기찬 곳은 식당이다. 인생의 재미 중 최고의 재미는 뭐니뭐니해도 먹는 재미일 것이다.

   저녁을 먹고 7층으로 내려가 보니 데크로 나가는 문이 열렸다. 3일 만에 쨍한 햇빛에서 데크길을 걸으니 좋기는 좋다.

2월 11일 항해 4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발파라이소로)

   요가를 마치고 갑판을 걸었다. 날이 많이 따뜻해졌다. 5층은 복구가 완료되어 정상 운영 된다는 방송이 나온다. 하지만 한 쪽 계단은 다닐 수 없다고 한다. 피해가 심했나 보다.
  가이도 다케루의 '메이킹 오브 네루다'를 들으러 갔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시성이며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그의 사랑과 투쟁에 대해 얘기한다.
  가이도씨는 발파라이소에서 내린다. 그의 모토는 '논란을 일으킴'이다 논란을 일으키기 좋아한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으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임한다.
  쿠바 혁명에 대한 책을 쓰면서 네루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네루다가  20세 때 쓴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가 유명하다. 네루다는 칠레 테무코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때 문학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문학하는 걸 반대했다. 친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세 달 만에 결핵으로 죽었고 의붓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산티아고에서 공부했다. 미스트랄은 시인으로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았지만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
  네루다는 17세에 대학에 들어가 학생 활동을 했다. 칠레 대학 다닐 때 학생회장 히메네스와 친했는데 그가 결핵으로 죽었을 때 추모사를 읊었다. 게라는 여자 문제로 결투했으나 졌다. 아소카는 20편 사랑 시의 주인공이다.

    네루다는 3번의 사랑을 했다.
  학생 연맹에 가입하면서 좌파 성향이 되었다. 교사가 되려다가 외교관이 되었다. 극동지역에서 영사가 되었다. 26세에 결혼했다. 그녀를 마르카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스페인 영사 시절 장녀가 태어났다. 딸은 선천적 장애가 있었다.

   프랑스 다음으로 스페인이 중요 외교국이었다. 아르헨티나 영사 시절 로르카를 만났다. 스페인  영사 시절 20살 연상인 여자도 만났다. 네루다의 거처는 여기 저기 다니며 피스보트 같은 생활을 했다. 이 때 '마음 속의 스페인'이란 책을 썼다. 퀴나르드는 재벌의 딸이었다. 이 여자에게 차여서 자살을 시도했다.

  1937년 파리로 갔다. 그 후 말레이시아로 갔다가 칠레로 갔다. 콩그리어는 붕장어 스프다. 네루다가 이것을 좋아했다.
  멕시코 재임 시절 3대 벽화가를 만났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부부도 만났다. 이들은 네루다의 망명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과테말라에서 아스투리아스라는 여성을 만났다. 이후 도피생활에서 이 여자가 여권도 빌려주며 도왔다. 칠레로 돌아왔을 때 델리아가 집을 구해주었다. 말 그림은 델리야가 그린 것이다.

   네루다는 상원의원에 당선 되기도 했다. 그 후 탄압  때문에 망명 생활을 했다. 네루다는 다양한 나라를 다녔다. 파리로 가서 피카소도 만났다. 피카소가 그린 비들기 그림은 평화 회의의 포스터로 사용되었다.

   본인은 네루다에 흥미를 느껴 그의 생애를 신문에 연재했다. 네루다는 그 후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추앙하는 연설도 했다. 당대의 거장들이 네루다의 책에 삽화를 그려줬다.
  네루다는 50세 때 칠레대학에 자신의 물품을 기증했다. 아젠데는 네루다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아젠데는 공산당의 지지로 태통령이 되었다. 1973년 대규모 시위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 후 아젠데는 자살했다고 하나 타살이란 설도 있다. 네루다의 주변 인물에 대한 얘기로 강연을 끝냈다.
   카지의 영어 교실에서는 얼마나 자주 운동 하느냐를 배웠다.

   일본어 교실에서는 '같이 식사할까요?'를 배웠다.

   다음은 장 옌의 얼후 파이널 콘서트를 보러갔다. 역시 30분 전부터 길게 줄을 늘어섰다.

   얼후 공연인데 첫곡은
'밤 하늘을 쳐다보세요.'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했다.

   음악과 함께 대만 사람 추엉씨의 춤도 보여줬다.

   졤베 연주단과 합동 공연도 했다.

   다섯 명과 함께 타이타닉에 나오는 라이라닉 폴카 공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장 옌 솔로곡인데 몽골의 경주에 쓰이는 곡이다.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냈다. 지루할 틈이 없다. 이 많은 사람들 데려다가 교통비 주고 밥 주고 수고비 주려면 돈도 많이 들겠다.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은 구름이 별로 없어 일몰이 아름다웠다.